2차 유림단 사건은 관련자가 많다 보니 변호사들도 대거 참여했다. 대구에서 활동하던 변호사들이었다. 한국인 10명에 일본인 2명, 총 12명이었다. 명단은 다음과 같다. 홍종률(洪鍾律), 홍긍식(洪兢植), 번영만(卞榮晚), 정석규(鄭錫奎), 한규용(韓奎鏞), 박해극(朴海克), 김완섭(金完變), 손치은(孫致般), 류성희(柳垶熙), 나카야마 카츠노스케(中山勝之助), 기시모토츠로(岸本銳次郎), 다나카 에이지로(田中永次郎) 등 12명이었다. 이 중에 김완섭, 손치은, 박해극, 홍종률 등은 1925년 9월 10일 일반인에게 법률 지식을 보급하기 위하여 사립법학강습소를 대구시내 명흠정 명신여학교에서 개학하여 강사로 활동하였다. 일본인 변호사 3명의 변론 기록은 현재 알 수가 없다.
대한제국 시기에 변호사, 사범 시험에 합격한 사람은 17명이었다. 1918년 조선인 판사는 35명, 검사는 10명이었다. 일본인 판사는 160명, 검사는 59명이었다. 조선인 판·검사는 민사사건으로 원고와 피고 모두 조선인인 경우에만, 형사에서는 피고가 조선인인 경우에만 재판에 관여할 수 있었다. 즉 한국인이 피고인 경우에 한해 재판하였지만 합의재판장은 하지 못하고 배석판사로만 있었다. 1922년부터 1944년까지 변호사 시험에 합격한 변호사 199명 중 한인은 114명이었다. 1927년까지 합격자는 14명이었다.
변호사 변영만

변호사 변영만(卞榮晩, 1889~1954)은 1905년 법관양성소에 제4기로 입학하였다. 1906년 7월에는 재판소 서기가 되었다가 12월 검사채용시험과 법관전고소시험(法官銓考所試驗)에 합격, 12월 17일 목포구재판소(木浦區裁判所) 판사로 임명되었다. 보성전문학교에서 1907년 2월 7일(음 12월 25일) 법률과 진급식을 행하였는데 야학 우등생은 변영만, 주학 우등생은 남형우 등이었다. 이들은 1908년 1월 보성전문학교를 2회로 졸업하고, 3월에 정치·법률·경제에 관한 학문적 이론을 연구 토론하고자 법학협회(法學協會)를 발기 조직하였다. 남형우(南亨祐, 1875~1943)는 대동청년단, 보성전문학교 법률학 교수와 학감·교감·교장, 국권회복단. 백산상회, 상해임정 법무총장과 교통총장 등을 역임하였다.
변영만은 <세계삼괴물>(1908)과 <이십세기의 대참극 제국주의> 등 일제를 우회적으로 비판하는 서적을 번안하거나 직접 써서 발간하기도 했다. 이들 책은 후일(1910) 일제가 치안에 방해가 된다는 명목으로 <황성신문> 등과 함께 금서로 묶어 발간과 배포를 금지시켰다. 변영만이 1900년대에 여러 학술지에 낸 법학 논문 중에서는 ‘사형폐지설’(1909) 즉 사형제 폐지를 주장하는 당시로서는 상당히 급진적인 논문도 있다. 그 후 한국 정부의 사법권이 일본 통감부로 이양되자, “왜놈의 사냥개 노릇은 죽어도 못 한다.”라고 법복을 벗어던지고 상경하였다. 무안군 목포항구 재판소 판사 변영만은 1909년 12월 판사를 사임하고 조선인 인권 변호사로 개업하였다.
1909년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 초대 총리를 암살하자 그의 변호에 참여하려 하였다. 일본 당국이 한국 변호사의 변호를 불허하고 오지 못하게 해서 안중근 의사를 변호하지 못하게 되었다. 1912년 중국으로 넘어가 오랫동안 머물면서 중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가들과 교유했고, 변호사로서 기자 생활을 했다. 항일독립투쟁을 했던 1928년 마산 사립호신(濠信)학교 맹휴(盟休)사건, 1933년 예천군 풍기 소작인 지세(地稅)불납(不納)동맹사건, 1939년 문천 적색농조재건 사건 등을 변호했다. 해방 후 1946년 3월 서울 명륜전문학교 교장으로 학교소비조합장을 맡았다. 정부 수립 후 해방 후 반민특위 재판장을 했으나, 반민특위가 해체되면서 좌절을 맛보았다. 변영만의 동생 변영태는 외무부 장관을 거쳐 국무총리로 활약했고, 또 다른 동생 변영로는 민족시인으로 명성을 날렸다. 1954년 12월 18일 사망하였다.
변호사 김완섭
변호사 김완섭(金完燮, 1898~1975)은 본관은 풍산, 경북 안동시 풍산면 오미동 출신이다. 그는 대한제국과 일제 총독부 판사였던 김병도(金秉度)의 아들이다. 김병도는 1909년 함흥지방재판소 경후구재판소 판사로 시작하여 1924년 4월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청 판사를 끝으로 그만두었다. 김완섭의 아들 김재철(金在撤, 1939~)은 1993년 사법연수원장을 끝으로 법복을 벗었다. 김완섭은 1921년 일본 명치대학 법과를 졸업하고 일본 사법성 시행 변호사시험에 합격하여 1922년 대구에서 변호사로 줄곧 재직하였다. 일제강점기 많은 항일독립운동과 관련한 변호를 하였다, 대표적인 것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924년 백산상회 실권주 소송에서 오태환의 200주에 대해 승소 판결을 이끌어 냈다. 독립군자금 모집하던 러시아 국적의 의용단원義勇團員) 이호(李虎) 재판을 변론하였다. 1924년 최윤동·이수영 외 7명의 군자금 모집과 관련한 대구중대사건에 대해 무료 변론하며, 김완섭 변호사는 “조선사람이 조선독립을 희망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라고 하였다.
1925년 전남 순천 농민연합회 간부 박중임, 조봉모 사건에 대해 무료 변론하였다. 동경에서 이루어진 김지섭(金祉燮)의 이중교폭탄사건(二重橋爆彈事件) 재판에서 김완섭 변호사는 폭탄 감정 문제와 관련하여 재판장이 성의가 없고 불공정하다며 재판장 기피 신청을 하였다.
1926년 2월 동경에서 재판 중이던 박열(朴烈)이 김완섭에게 공판 입회 요청의 편지를 보냈다. 2월 27일 동경대심원 특별법정에서 김완섭은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를 주장하였다. 1926년 5월 대구 조선일보 김천지국장 이산의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 사건에 대해 검사가 태형을 선고한 것에 대해 “언론인에 대한 태형은 너무 가혹하다. 기사의 보도는 신문기자의 직무일 뿐 하등(何等)의 죄는 없다.”라며 무죄 변론을 하였다. 8월 경북 안동 풍산 소작쟁의 사건, 예천군 라라면 소작쟁의사건을 무료 변호를 하였다.
1926년 7월에 발생한 전주고보 불상사건(全州高普不祥事件)을 변론하였으며, 1927년에는 대구진우연맹(真友聯盟) 사건 피고인을 변론하였다. 진우연맹은 대구시내에 있는 관청, 회사, 은행, 우편국 기타 주요 건물을 파괴시키며 도지사 이하 각 관리의 생명을 빼앗겠다는 목적을 가졌다. 재판에서 방청을 금지하자 김완섭 변호사는 불공정하다면 변호사를 사임하겠다고 하였다. 피고인들도 항의하여 결국 재판장은 방청석에 가족 10명을 더 앉도록 하는 타협을 하고 재판을 속개하였다.
1927년 통영 김기정(金淇正)사건에 대한 변호를 하였다. 경남도 평의원 김기정이 “조선사람에게는 교육이 필요치 않다. 조선사람은 보통학교만 나오면 사상이 ‘악화’되어 사꾸라몽둥이를 끌고 다니며 불량한 짓을 하고 사회운동의 선봉이 된다. 지난 1919년의 소요 이래 당해 보지 않았느냐? 조선은 교육으로 망했다.”라는 망언을 서슴지 않았다. 김기정을 규탄한 통영 사람들을 경찰들이 구속하였다. 김완섭은 “자라나는 어린 조선의 싹을 위해 김기정을 그대로 둘 수는 없는 일이다.”라고 하였다. 1934년 경북도의원 김완섭은 “교육기관의 불비(不備)로 농촌 계발에 장해가 되고, 30~40리를 다닐 수 없다.”라며 질타한 적이 있다.
1928년 익산신간회사건, 김해청년동맹집행위원 최녀봉 등 폭력행위 출판법위반사건, 대구 민족주의적결사(民族主義的結社)ㄱ(기역)당원(黨員) 사건, 문경점촌불경범(聞慶店村不敬犯) 사건을 변론하였다.
1928년 여름 유림단 사건으로 재판을 받는 김창숙을 변호하게 되었다. 대구 감옥에서 김창숙에게 처음으로 면회가 허락되자 변호사 김용무, 손치은 등이 변호하기를 간청하므로 ‘변호사를 사절함’이란 시를 써주었다. 어머님도 자식도 죽어 집이 망했고 병든 몸이라 구차하게 살기 싫은 상황이었다. 그래서 포로의 신세로 바른 도리를 얻어야 죽음도 영광이라, 구구한 변호를 사양하였다. 그 후 김완섭이 재삼 변호하기를 간청했다.
김완섭은 변호사 위임을 간청하며 세 번이나 찾아가서 만나보지 않고는 가지 않겠다며 서서 기다렸다. 결국 면회를 허용했다. 하지만 김창숙은 “나는 대한 사람으로 일본 법률을 부인하는 사람이다. 일본 법률을 부인하면서 일본 법률론자에게 변호를 위탁한다면 얼마나 대의에 모순되는 일인가. 자네는 일본 법률론자이다. 일본 법률로 대한인 김창숙을 변호하려면 자격이 갖추어지지 않는 것이다. 자격이 갖추어지지 않았으면서 억지로 변호하려는 것은 법률의 이론으로 또한 성립될 수 없을 것이다. 자네는 무슨 말로 나를 변호하겠는가? 나는 포로다. 포로로서 구차하게 살려고 하는 것은 치욕이다. 정말 내 지조를 바꾸어 남에게 변호를 위탁하여 살기를 구하고 싶지 않다. 내 말은 다했으니 자네는 돌아가라.”라고 하였다. 김창숙은 12월, 14년 징역을 선고받았으나 공소 권유도 뿌리치고 대전형무소로 이감되었다.
1929년 대구학생비밀결사사건의 재판 공개를 금지하자 “이를 공개 금지한다면 세상의 의혹을 사서 자녀교육상 막대한 영향이 있겠다.”라며 극력 반대하여 재판장도 마침내 공개를 결정하고 재판을 진행하였다. 김완섭은 “금번 학생사건은 오직 학생들의 사회과학을 연구하는 단체에 불과하고 결코 사유재산제도(私有財產制度)를 부인한다는 것이 아니므로 국체변동(國體變動)에는 아무 의미가 포함되지 아니하였다. 치안유지법 위반도 적용할 것이 아니다.”라는 취지로 변론하였다. 또 전남 배달청년사건(培達靑年事件)도 변호하였다.
1930년 광주학생운동 사건 변호단의 일원으로도 활동하였다. 대구에서 최상봉 외 23인에 대한 복심재판이 있었기 때문이다. 김해청년격문사건, 영주청년동맹사건(영주일이차격문사건), 대구옥중만세사건. 경북공산당 사건 등을 변론하였다. 1935년 예천공산당사건(예천무명결사사건), 1937년 수원고등농림학교사건(수원고농사건)을 변호하였다.
1930년대에는 일제의 탄압정책으로 항일독립운동이 지하로 잠입하였다. 1937년 대구 인물 김완섭에 대해 신문은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法界驍將(법조계효장)이요. 政治的手腕家金完燮(정치적수완가김완섭) 氏(씨) : 대구 법조계의 효장(驍將)인 변호사 김완섭의 이름은 너무나 유명한 터이다 씨는 재학 당시 신동이란 말을 들었다. 명치대를 졸업하자 즉시 고등문관시험(高等文官試驗)에 합격되여 대구에서 변호사 개업을 한 것은 10여 년 전 일이다. 이래 수많은 사건을 담당하여 이름난 변론을 토(吐)해온 터로 논조(論調)의 질서정연한 점과 논지의 명효(明曉)한 점은 조선 법조계에 유일한 존재로 자타가 공인하는 바이다. 현재 대구부의원으로 대구서부 발전과 교육기관의 부족을 절규하여 왕왕 중대한 문제에 착목(若目)하여 호사(護事)를 유리케 진전시킨 것이 한두 번이 아니다. 두 번의 부의원(府議員)과 한 번의 도의원(道議員)을 지냈다.”
해방 후 1946년 대검찰청 검사관을 지내고, 성균관대학교 교수를 지냈다. 1949년 심계원(審計院, 현 감사원) 차장과 1952년 법전편찬위원회 위원을, 1951년 공무원전형위원으로 지냈다. 1952년 고려대학교 강사도 지냈고, 1975년에는 고려대학교에서 법학박사학위를 수득하였는 데 학위논문이 <한국혼인고>이다.
4남 1녀를 둔 만송 김완섭은 초대 대법원장인 김병로의 장손녀를 며느리로 맞았다. 일제강점기에 경국대전, 집대전, 삼국유사 원본, 동국이상국집, 삼국사기, 삼국통일, 용비어천가 본판 7책, 열하일기, 동국여지승람, 문헌비고, 성학십도, 대전회통, 문헌통고 등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각종 고전문헌을 수집하였다. 그는 고서 수집가로 소문난 자신의 집에 침입한 강도에 의해 1975년 말 불의의 사고사를 당했다. 자녀들은 선친의 뜻을 기려 문화재급 희귀고서 2만 권을 고려대에 기증해 ‘만송문고’를 만들었다. 또 5000만 원의 재원으로 만송장학기금을 설립해 지금껏 고려대 법대 학생들에게 지급하고 있다.
이병길 작가, 지역사 연구가, 항일독립운동연구소 소장
[저작권자ⓒ 울산저널i.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