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활동한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당시 서구 사회의 변화에 ‘탈신비화’라는 이름을 붙였다. 주술과 마법의 힘에 의존하고, 인간의 이해를 넘는 신비한 영역을 인정하던 시대를 지나, 무엇이든 설명하고 예측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합리적·과학적 신념이 퍼져나가던 시대의 흐름을 포착한 말이었다. 그가 언급한 관료제는 오로지 합리성과 법에 의해 권위를 확보하는, 신비함이 벗겨진 의사결정 기계다. 베버는 어디까지 옳았는가.
훌륭한 합리성에서는 모종의 신비함이 느껴진다는 역설은 차치하고라도, 신비에 대한 감각은 현대에도 사라지지 않고 합리성만으로 확보할 수 없는 정당성을 국가 제도에 부여하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법원이다. 법원은 여전히 법복을 입고 있는 법관이라는 세속적 성직자들이 폭력을 독점한 국가의 권위에 힘입어 사회의 현존 질서를 지탱하는 법률의 의미를 새겨주는 ‘성스러운’ 공간이다. 삼권분립하에서 민주공화국의 최후의 보루, 기본권의 마지막 수호자 같은 ‘주술적인’ 현판이 달려 있는 하나의 세속적 신전이다. 헌법이 보장하는 독립성뿐 아니라, 죄를 지으면 벌을 받게 된다는 인간의 원초적 정의감과 두려움이 역사적으로 응축되어 사람들의 마음에 근대적 모습의 신성을 불러일으키는 제도가 사법부다. 그 신전의 제사장들인 법관은 오로지 법, 그리고 따지고 보면 신비한 개념인 ‘양심’에 따라서만 판결한다. 개개의 판결이 부당하다 생각되어도 사법부 전체는 그 개별성을 훌쩍 뛰어넘는 독립성, 중립성, 합리성, 그리고 자유와 질서의 상징이었다.
현행 제6공화국 헌법의 꽃 중 하나이자 현 정국 중심에 있는 헌법재판소도 마찬가지다. 제5공화국까지 허수아비에 불과했던 헌법위원회가 현행 헌법에서 헌법재판소로 재설계되자, 초기 헌법재판소는 당시 권위주의 정권의 막대기였던 사회보호법 5조 보호감호에 대한 위헌 선언, 억울한 이들이 호소할 곳 없었던 검찰의 불기소처분에 대한 헌법소원 등 적극적 판단을 하면서 시민들에게 ‘헌법’ 재판의 가치를 각인시켜왔다. 행정수도 이전 등 사회적 논란의 한가운데 있던 사안들로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2017년 대통령 탄핵 결정과 같이 제6공화국에는 헌법적 이슈에 대해 비가역적 최종 판단을 내릴 권위가 있는 ‘신성한’ 기구가 있다는 사회적 신념이 자리 잡아 왔다.
2025년 1월19일 새벽의 사건이 유난히 충격적으로 다가오는 이유는 현대 국가의 한 성역, 사회적 약속이라는 성스러운 휘장이 둘러쳐진 공간의 경계가 무너진 상징적 사건이기 때문이다. 많은 시민들이 국회가 침범당한 2024년 12월3일 밤과 법원이 침범당한 1월19일 이후 말을 잃어가는 것은 탈신비화의 맨얼굴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신비함이 극복된 것이 아니라 단순히 부정되고 폭력적으로 파괴됐을 때 무슨 일들이 벌어질 수 있는지 직감한 것이다.
그러나 파괴적 탈신비화는 이미 진행되고 있었다. 오래전부터 정치인들은 ‘대화와 타협’으로 해결할 일들을 사법화했고, 자신들이 원하는 결과엔 자기애적 찬사를, 반대의 경우엔 유감과 비판을 넘어 제도 자체를 부정하는 듯한 노골적 언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들에겐 정쟁의 방책으로 치부될지 몰라도 공동체를 유지하는 사회계약은 조금씩 훼손되어 갔다.
자유로운 시민들은 법원 판결을 비판하는 데 주저할 필요가 없다. 현실의 사법부가 ‘신성불가침’의 영역은 아니다. 민주적 원리에 따라 구성된 제도가 아닌 것도, 역사적으로 늘 민주주의 편에 서지는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이 순간에도 정의를 세우지 않고 상처받은 시민들을 싸매주지 않았던 판결들이 머리에 떠오르며 망설임을 강요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법과 시민들은 사법부에 권위를 부여한다. 그것이 사회계약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작금의 재판관 자격 논쟁과 법리 논쟁에서 보듯이 이데올로기적 충돌의 시대에 신비함의 외투가 벗겨진 권위에는 힘이 없다. 결국 현대에도 신성함의 감각은 사회를 지탱하는 힘으로 남아 있다. 그마저도 아니라면 노골적 폭력만이 남는다. 그것은 사회를 지탱하는 힘이 아니라 억압하고 파괴하는 힘일 뿐이다.
국가를 강조해 온 보수도, 국가를 비판해 온 진보도 제도가 무너져가는 모습에 당황했다. 공화주의적 제도를 지탱하려는 의지는 보수와 진보가 다를 이유가 없다. 최근 헌법 필사가 유행이라고 한다. 수도사들이 경전을 조심스레 필사하듯 우리 마음에 필사해둔 사회계약은 무너지지 않는다. 기후 위기와 전쟁의 가능성에 직면한 후대의 시민들에게 찢어진 사회계약서까지 남겨줄 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