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결투쟁과 기독청년 전태일의 ‘연민’

2024-12-24

[논설·시론] 송필경 논설위원

나는 무엇보다 전태일이라는 인물이 내 시대에 이 땅에 태어난 사실에 한없는 고마움을 느낀다. 자신의 가슴에 안긴 숯덩이가 된 아들이 '어머니 제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꼭 이루어주세요'란 애절한 마지막 유언을, 한 치도 어긋나지 않게 삶을 이어간 이소선 어머니께 한없는 고마움을 느낀다.

지식수준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았고 사법고시 합격자인 조영래(1947〜1990)는 유신독재의 수배를 피해 우리나라에서 가장 낮은 곳이었던 청계천 노동자들의 거처에 숨어들었다. 조영래가 그 곳에서 전태일 영혼의 친구가 되어 전태일의 아름다운 삶을 고스란히 되살린 위대한 평전을 쓴 작업에 한없는 고마움을 느낀다.

어떤 몫도 없이 이 땅에 태어난 모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친구가 되고자 했던 전태일은 한 시대를 특징지은 이름이었다. 전태일은 비록 비렁뱅이로 자란 무지렁이였지만 특별히 예민한 통찰력으로 막 시동을 걸기 시작한 남한 자본주의의 모순을 포착했다. 자본주의가 지속하는 한 근본 모순은 해결되지 않으리라고 본다.

만 22세에 스스로 운명하면서 전태일은 두 외침을 우리 사회에 남겼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한 외침은 정치적 요구고 다른 외침은 윤리적 요구다. 노동운동가들이 전태일을 계급투쟁의 화신으로 본다면 나는 기독청년 전태일을 예수가 인류에게 그토록 당부한 이웃을 사랑했던 인간으로 본다.

전태일의 두 외침은 지금 오늘 바로 여기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전태일을 우리가 만나려면 인격과 인격으로 만나야 한다. 전태일과 만난다는 의미는 인간세상의 모든 비극이 그렇듯 아픔에 대한 성찰이다. 가난과 소외로 실망에 빠져 이미 희망을 잃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우는 자세로 만나야 한다.

전태일은 우리 시대에 가장 근본적인 가치를 생각했고 생각한 대로 살다간 모범적인 젊은이였다. 어떤 편견에서도 벗어나 전태일 유언의 외침을, 있었던 그대로 보아야 한다. 조영래가 복원한 전태일의 삶에서 우리는 전태일의 생각을 따라가면서 우리의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에게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성찰해야 하리라.

스스로 불꽃이 된 죽음의 결단이 아무리 숭고했더라도 전태일은 인간이었다. 아무리 존엄한 존재라 하더라도 개인숭배는 있을 수 없다. 인간을 신화화 하거나 우상화 하는 것은 실존을 비하하기 때문이다.

전태일을 이상화해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성인이나 또는 영웅의 모습으로 보거나, 반대로 단지 불만이 쌓인 무지렁이 밑바닥 노동자라는 과격한 투쟁가로 봐서는 우리는 전태일의 온전한 모습을 왜곡하게 된다.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스스로 동기를 이끌어내고 우리의 노력에 의지해야지, 전태일이란 카리스마에 기대어서는 안 된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고 분신하며 남긴 유언의 참뜻은 전태일의 삶과 인격을 우러러 봐야 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전태일이 외친 유언의 의미를 우리시대 나와 우리 삶의 문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픔을 겪지 않거나 아픔을 이해하지 않으면 인간의 영적인 성숙은 있을 수 없다. 우리는 전태일의 아픔을 구체적인 느낌으로 만나야 한다. 그러나 전태일은 55년 전 눈감았다. 전태일이라는 인간의 실체는 만날 수 없다.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것은 전태일의 생각이다.

장엄한 순교를 택한 전태일에게 절대적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맹목적으로 복속하는 것과 같다. 우리는 전태일에게서 생각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인류 노동운동사에서 가장 위대한 사상을 제시했던 칼 맑스의 ‘엄밀한 논리’ 또는 ‘싸늘한 객관’도 아직까지는 인류(노동자)를 구원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만이 구원할 수 있다. 그 구원의 길이란 우리가 전태일보다 더 따뜻한 마음으로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을 바라봐야 한다는 점이다. 전태일의 웅장한 사회적 외침은 너무나 착한 마음의 바탕에서 시작했다. 바로 연민이다.

“나는 감정에는 약한 편입니다. 조금만 불쌍한 사람을 보아도 마음이 언짢아 그날 기분은 우울한 편입니다”고 전태일은 일기에 썼다. 이런 연민이야말로 시대를 초월한 아름다운 향기가 아니겠는가?

평화시장 봉제업체에서 14시간 일한 다음 날 출근하자마자 미싱대 앞에서 깜빡깜빡 조는 '어린 여성 노동자'가 아침을 굶고 왔다는 걸 알자, 전태일은 집에 돌아갈 차비를 털어 풀빵을 사줬다. 대신 밤 10시에 일이 끝나면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12km 가량 떨어진 쌍문동 집까지 3시간 이상 걸어간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전태일의 22년이란 짧은 삶에서 가장 놀라운 부분은 정규교육을 거의 받지 않았지만 너무나 아름답고 설득력이 있는 사상의 글을 많이 남겼다는 사실이다. 운명이 늘 어두웠던 전태일이 품위 있고 심오한 글을 쓴 것은 교육이나 교양을 통해 얻은 것이 아니라 타고난 것이며 그 나름의 독특한 생활체험 위에 시대를 통찰하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려대학교 황현산(1945∼2018) 전 교수는 몸으로 체득한 진실과 밑바닥 진실이 마지막 진실이라 했다. 미국의 대사상가 소로우(David Henry Thoreau; 1817〜1862)는 주인의 눈치를 살피는 순종적인 개의 눈이 아니라 야생 늑대의 맑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라고 했다.

전태일은 야생의 맑은 눈으로 이 세상을 바라본 삶을 살면서 우리시대 가장 진실한 글을 남겼다. 조영래는 『전태일 평전』을 통해 전태일의 삶을 복원하면서 앞으로 변혁운동의 운명은 전태일이 담당자인 것을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1970년 이후 남한사회에서는 노동하면 언제나 전태일이란 이름이 따라 붙었으며 노동운동뿐 아니라 진짜이든 가짜이든 간에 변혁운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시카고대학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1943〜)는 자신의 저서 『한국현대사』에서 이렇게 썼다.

“1970년 한 노동자의 고독한 행동이 있었는데 돌이켜보면 한국노동운동사의 이정표가 되었다. … 중략 … 전태일의 희생에 자극 받은 많은 단체들이 행동에 나섰으나 그의 가장 큰 유산은 아마도 그가 죽은 바로 그 달에 결성돼 그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지도 아래서 혹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 내내 강력한 영향력을 끼친 청계피복노조였을 것이다.”

전남대 철학과 교수를 역임한 김상봉(1960〜)은 자신의 저서 『철학의 헌정』에서 이렇게 썼다.

“1980년 광주와 1979년 부산·마산의 시원은 대구다. 왜냐하면 거기서 전태일이 태어났기 때문이다. 대구는 박정희의 도시가 아니라 실은 전태일의 도시다. 전태일이 누구인가? 그는 슬픔의 예수와 분노의 예수, 눈물의 예수와 빛의 예수를 자기 속에 하나로 구현한 영혼이었다.

대구 남산에서 태어나 서울 평화시장에서 만난 전라도 소녀들에게 차비를 아껴 붕어빵을 사 주다가 불꽃으로 산화한 그는 스스로 빛이 된 눈물이다. 어느 누구의 삶도 눈물과 불꽃이 어떻게 하나인지를 전태일의 삶처럼 그렇게 처절하게 보여 주지는 못 할 것이다.

1979년 10월 부산과 마산, 그리고 1980년의 광주는 1970년 11월 불꽃이 되어 작력한 전태일의 눈물이 여기 그리고 저기에서 펼쳐지고 부활한 사건에 다름 아니다.”

전태일은 눈물이다. 눈물을 감지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눈물은 누군가에게 보낸 한없는 연민과 사랑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상대가 지닌 날카로운 무기보다 더 육중한 무기가 연민의 눈물이다.

한편 상처받은 심장에서 터져 나온 불꽃의 외침은 마치 피 속에서 건져낸 듯한 말이었다. 자본주의 모순의 고통을 꿰뚫은 전태일의 외침은 자본주의가 존재하는 한 우리가 기억하고 끊임없이 상기해야 한다.

나는 단결투쟁을 외치는 불끈 쥔 주먹과 기독청년 마음속 깊이 고여 있는 연민의 눈물이 우리가 지녀야 할 동전의 양면이라 생각한다.

**

투쟁이 없다면 진보도 없다.

이 투쟁은 도덕적인 것일 수도

물질적인 것일 수도, 둘 모두에 해당하는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투쟁은 투쟁이어야 한다.

권력은 요구 없이는 어떤 것도 내주지 않는다.

권력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민중들이 소리 없이 복종하고 있는 것들을 찾아내라.

그러면 당신은 부정의와 잘못을 일으키는

명확한 조치가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러한 부정의와 잘못은 민중들이

말 혹은 소리 혹은 둘 모두를 이용해

저항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 『미국 민중사를 만든 ‘목소리들’』(하워드 진, 앤서니 이노브 지음. 황혜서 옮김. 도서출판 이후. 2011)의 첫 쪽에 나온 글

글쓴이는 프레드릭 더글라스(Frederick Douglass;1817〜1895)로 미국 남부에서 흑인노예로 태어났다. 북부로 탈주해 활동하다 영국으로 건너가 자유인이 되었다. 다시 미국인으로 돌아와 노예폐지론자로써 개혁가, 인권운동가, 철학자, 정치인, 작가로 활동했다. 특히 교육받지 않은 흑인 남성이 너무나 설득력 있는 글을 발표할 수 있었다는 걸 당시 사람들은 믿기 힘들어했다. 마치 전태일의 글처럼...

다음은 프레드릭 더글라스의 어록이다.

“그대가 읽는 법을 배운다면, 그대는 영원히 자유로워지리라.”

“우리는 하늘에서 번개가 치길 귀 기울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새로운 날의 새벽별에서 비추는 희미한 빛을 통해서 우리는 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수 백 년의 고통 속에서 해온 기도의 답을 백 년 동안 기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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