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산책] 법의 역할

2024-10-20

9월6일 법학교수회의 60주년 기념식이 있어 은행법학회장 자격으로 초청받아 참석했다. 참석 요청을 받았을 때 참석 예정자가 적어 자리를 메꿔달라는 줄 알았다. 하지만 예상과 달리 대형 콘퍼런스장엔 자리가 없어 서 있어야 할 정도로 행사는 성황을 이뤘다. ‘법학의 위기’라는 문제의식 속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어진 콘퍼런스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법학교수회가 진단한 법학의 위기는 로스쿨이 설립 취지와는 달리 법학을 법조인 자격시험을 위한 기술적 지식으로 전락시켰다는 점에 있다. 이로 인해 법의 근본문제와 원리를 탐구하는 기초법학이 퇴조하고 법학 발전이 크게 저해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법학의 위기’라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법학자·법학교육·법학연구’라는 주제로 진행된 9개 세션 중 세가지 발표가 특히 큰 관심을 끌었다.

한 발표에서는 ‘경세법학(經世法學)’의 실패를 지적했다. 경세법학은 법학이 구체적 분쟁 해결을 위한 법리 개발을 넘어 공동체의 미래 방향 설정에도 주력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경제 발전과 사회 개혁을 위한 제도적 틀을 설계하는 데 법학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경세법학 논의가 가장 활발했던 시기는 1980∼1990년대였다. 경세법학을 실천하고 시험을 위한 ‘수험법학’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선 로스쿨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1995년 제기됐다. 10년 넘는 논의 끝에 2007년 로스쿨법이 통과됐고, 전국에 25개 법학전문대학원이 설치됐다. 그러나 이번 법학교수회에서는 로스쿨 제도가 취지와는 달리 기초법학의 퇴조를 초래했고, 경세법학도 함께 위축시켰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로스쿨이 오히려 ‘수험법학’과 ‘법률상인’을 양산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로스쿨 도입 의도와는 달리 정반대의 결과가 나온 셈이다.

다른 발표에서는 로스쿨 제도가 겉으로는 미국식 제도를 수용했으나 실제로는 전혀 다르게 운용된다는 현실 진단이 나왔다. 예일·하버드·스탠퍼드 등 주요 로스쿨 교수진의 37∼44%가 경제학 등 법학 이외의 박사학위를 보유하고 있다. 이는 다양한 분야의 전문성을 바탕으로 학제간 연구가 활발히 이뤄질 수 있는 환경임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법학이 시대 변화로 나타나는 사회문제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 눈길을 끌었다. 발표에서는 인구 고령화와 돌봄, 다문화와 이민자, 경제안보, 인공지능, 재해, 지방소멸, 기후변화 등 환경 변화로 인한 7가지 주요 문제에 대해 법학이 보다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하지만, 법학 분과간 소통 부재와 학제간 연구 부족으로 이러한 문제들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지적됐다.

이날 발표된 지적들에 따르면, 로스쿨은 현재 큰 도전에 직면해 있다. 법학이 분쟁 해결을 등한시해서는 안되지만, 동시에 공동체의 미래를 설계하는 일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 세상의 변화에 대해 치열한 학문적 성찰이 필요하다. 법학은 그동안 학문성이 부족하다는 지적을 받아왔는데, 이를 극복하기 위해선 다양한 분야의 전문성을 수용해야 한다. 현대의 법은 매우 다양한 전문분야에 기반해 설계돼 있다. 우리나라 법학은 다른 학문분야에 개방적이지 못한 것이 현실이다. 법학이 개방성을 갖추지 못한다면 잃는 것은 법의 현실 적합성과 국민의 신뢰다. 법학이 시대적 변화에 보다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공동체의 미래를 설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김자봉 한국금융연구원 선임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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