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협 100주년과 치과의사의 윤리(1): 전문직 형성을 위한 선도적 노력

2025-02-26

에 오랫동안 연재되고 있는 칼럼으로 “The Ethicist”가 있습니다. 현재 뉴욕대학교 철학과 교수인 윤리학자 콰매 앤터니 애피아가 맡은 이 칼럼은 독자가 보내는 윤리 관련 질문에 윤리학자가 답하는 방식으로 꾸려지고 있습니다. 치의신보에서 매월 1회 의료윤리 주제로 같은 형식 코너를 운영해 치과계 현안에서부터 치과 의료인이 겪는 고민까지 다뤄보려 합니다.<편집자주>

김준혁 치과의사·의료윤리학자

약력

연세대학교 치과대학 졸, 동병원 소아치과 수련.

펜실베이니아대학교 의과대학 의료윤리 및 건강정책 교실 생명윤리 석사.

연세치대 치의학교육학교실 교수

저서 <누구를 어떻게 살릴 것인가>(2018),

역서 <의료인문학과 의학 교육>(2018) 등.

오는 4월에 있을 치협 100주년 행사를 맞아, 본 칼럼은 그간 치협의 활동에서 치과전문직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윤리적 수행으로서 치의학과 치과 진료를 구축하려 노력해 온 모습을 2회에 나누어 검토합니다.

먼저, 여기에서 말하는 전문직의 윤리적 수행이란 개념을 간단히 정리하고 시작해야겠지요. 이것은 구강 영역에서 비슷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직군과 치과의사를 구분하려는 과정에서 행해진 여러 결정 및 제안을 의미합니다. 근대 초기, 발치사와 치과의사의 진료와 접근을 구분하여 환자 구강 건강을 향상하기 위해 진력했던 피에르 포샤르가 그 출발점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한국 치과 전문직에서도 비슷한 활동을 여럿 찾아볼 수 있지요.

먼저 1930년대, 치협의 전신인 한성치과의사회가 벌인 구강위생 운동과 한국인의 구강 현황 조사를 들 수 있겠습니다. 1928년부터 일본 정부 주도로 충치 예방의 날 행사가 열렸는데, 1930년대가 되면 한성치과의사회는 충치 예방의 날과 같은 시기에 별도로 무료 검사 및 치료 행사를 벌이고 충치 예방 강연을 열어 대중에게 치과 진료의 필요성을 알렸습니다. 이런 구강건강 계몽 활동은 구강질환 예방을 위한 보건학적 접근이기도 하지만, 일제강점기 어긋난 치과 진료 환경에서 한국인의 구강을 지켜내고 한국인 치과의사가 입치사나 일본인 치과의사의 진료 행위와 구분되는 업무를 수행하고 있음을 보여주려는 노력이기도 했습니다.

당시 상황을 알려드리면 좋을 것 같아요. 서양인 및 일본인 치과의사에 의해 1900년대부터 조선에서 치과 진료가 이루어지긴 했지만, 당시 보통 사람들이 치과 진료를 접할 수 있는 보편적인 통로는 잇방에서 입치사를 통한 보철 진료였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입치사는 보철 기술에 더해 아주 간단한 치과 치료를 배운 사람들이었고, 이들이 잇방(“이 해박는 집”이 더 익숙하시지요)을 열어 사람들을 치료했습니다.

당시 세브란스의학교 치과학교실 과장으로 근무했던 치과의료선교사 윌리엄 샤이플리(1915~1920년 근무)와 후임 존 부츠(1921~1939년 근무)는 이런 상황이 한국인의 구강 상황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보고서나 발표문 등을 통해 지적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조선인에게 치과란 치아를 만드는 법을 배운 금은세공업자가 하는 일로 인식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치과에 대한 인식(지금은 구강건강 문해력이라고 부르지요)은 시급한 개선이 필요한 상태였습니다. 오죽하면, 개업한 치과의사들은 자기 치과를 홍보하며 치과와 구강과를 같이 진료한다고 걸어놓곤 했어요. 사람들이 “치과”라고 하면 먼저 잇방과 입치사의 진료를 떠올렸기 때문에, 치과의사들은 그에 더하여 구강 수술을 해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한국인 최초의 치과의사이자 한성치과의사회 초대 회장이었던 함석태 선생의 착상이었던 이 치과·구강과 병기는 선배 치과의사들이 어떤 상황에 놓여 있었는지 보여주는 흥미로운 지점이자, 치과의사의 진료와 입치사의 그것을 구분 지으려던 전문직업적 노력이지요.

이런 노력은 일본인 치과의사의 치의학적 접근 방식과 자신의 것을 구분하려는 노력에서도 나타납니다. 일본인 치과의사들은 한국인의 구강 상태에 크게 관심이 없이 자신들의 이전 지식을 관철하는 데 급급, 조선인들의 구강건강 현황을 살피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일본인 치과의사 중 일부는 독성이 큰 재료를 실험이나 진료 용이성 등의 이유로 막 사용하곤 했지요. 이런 강압적인 접근과 달리, 세브란스의학교 치과학교실은 조선인의 구강 구조나 질환의 특성을 살펴서 그에 맞는 진료를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현황 자료에서 출발해야 제대로 된 치의학을 제공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고요. 치과학교실 자체로도 조선인의 구강건강 현황을 조사하기도 했지요. 한성치과의사회 또한 구강질환을 조사하기 위한 여러 노력을 기울였고, 그 일환으로 아동을 대상으로 한 구강 검진을 시행했던 것입니다.

정리하면, 한성치과의사회 주도로 열린 구강위생 운동은 치과의사들의 구강건강 개선을 위한 보건 활동을 넘어 기존 구강 진료 업무를 수행해 오던 입치사 및 일본인 치과의사와 다른 입지를 점하려는 시도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저 구강 영역에서 일하는 금은세공사나 조선 땅과는 다른 환경에서 구축된 지식을 강제로 전파하는 식민지배자의 그것과 달리, 한국인 치과의사는 자신들이 국민의 구강건강을 책임지는 자이며 이 사회에서 역할을 부여받은 전문직으로서의 자리매김을 분명히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상황이 녹록지 않았기에 그 활동은 여러 가지로 제한적이었지만(예컨대, 총독부가 성인 대상으로 조사를 허용치 않았기에 아동만을 조사 대상으로 했다거나) 이후 강제로 경성치과의사회에 합병되기 전까지 한성치과의사회는 구강위생 운동을 이어갔습니다. 광복 후 치협이 구강위생 강조주간 행사를 열어 그 운동을 이어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던 것이지요.

시계를 빠르게 돌려볼까요. 1971년 10월 23일, 제20차 치협 대의원 정기총회는 치과의사 윤리강령을 제정합니다. 이미 대한의학협회는 세계의사회의 국제의사 윤리강령을 번역, 1961년 의사의 윤리를 발표한 바 있었습니다. 그러나 의사가 외국의 것을 그대로 들여온 반면, 1971년 치협의 윤리강령은 자생적인 선언이었다는 점에서 놀랍습니다. 의료윤리학적 관점에서 보면 아쉬운 점이 많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미국에서 의료윤리학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시작된 것이 1968년이고, 국내에 수입된 건 1997년이니까요.

“치과의사는 그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학술연마로서 인류사회에 봉사하려는 정신을 투철히 하며 드높은 의료인으로서의 긍지를 지녀야 한다.”라는 문구로 시작하는 강령은 구강건강 향상 및 치과의사의 지식·기술 증진을 위한 전문직업적 헌신을 토대로 진료에 있어 영리적 동기에 좌우되지 않을 것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단지, 이 강령은 선포에만 그쳤고 이후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는 점은 아쉽습니다. 이 강령만으론 당장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기 어려운 데다가, 누군가 그 해석을 내놓는다고 해도 모두가 그에 합의할지 알 수 없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지요.

그러나 그 정신은 높이 살 만하며 여전히 저희가 생각하고 따라야 할 내용을 짚은 것도 사실입니다. 무엇보다, 이런 시도가 있었다는 것 자체를 기억하고 후대인 우리 또한 그 방향성을 잇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어야 하겠지요. 다음 글에선, 이런 선배들의 노력이 최근 사안과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선생님이 진료하시거나 치과의사로 생활하시면서 가지셨던 윤리와 관련한 질문을 기다립니다.

dentalethicist@gmail.com으로 보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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