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TV=권지현 기자] #교사로 일하다 5년 전 명예퇴직한 강모(61)씨는 최근 한 시중은행 점포를 찾았다. 노후 자금을 관리하기 위한 신탁 상품에 가입하기 위해서다. 강씨는 재산을 안정적으로 관리해주고, 세상을 떠났을 때 남은 자산처리까지 믿고 맡길 수 있는 곳은 은행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금리가 내려오고 있고 자산시장에 마땅히 수익을 낼 만한 투자처도 보이지 않아 은행 신탁에 재산을 맡기게 됐다"고 말했다.
낮은 수익률로 미운 오리 새끼 취급받던 은행 신탁이 '조용히'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다. 은행들은 올해 들어 새로운 신탁 상품을 잇달아 선보이며 고객 유치전을 펼치고 있다. 지난달 12일부터 자본시장법 개정안에 따라 보험금 3000만원 이상이면 누구나 신탁을 활용해 사망 보험금 지급 계획을 미리 세워둘 수 있게 된 만큼 은행권 신탁상품 경쟁은 더 치열해질 전망이다.
3일 금융권에 따르면, 은행권은 올해 하반기 4개의 신탁 상품을 새로 출시했다. 신탁(信託)은 말 그대로 '믿고 맡겨달라'는 취지의 금융 상품으로, 은행은 고객들이 맡긴 돈을 채권, 주식, 부동산 등에 투자하고, 관리·처분까지 해주는 일종의 자산 관리 서비스다. 신탁 상품은 수익률이 낮아 과거엔 '아는 사람만 가입한다'는 말이 돌 정도였지만, 최근 금리 인하가 본격화되고 국내 증시도 지리한 행보를 보이자 자금 운용에 더해 상속과 증여 문제까지 해결하려는 수요가 몰리면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올해 6월 말 기준 은행 신탁 수탁액은 616.8조원으로 전년 동기보다 11.1조원 늘었다. 은행 신탁 수탁액은 2018년부터 매년 10%대의 증가세를 이어오고 있다. 2021년 말 500조원을 밑돌던 수탁액은 1년 만에 550조원에 육박, 지난해 6월 말에는 600조원을 넘어섰다. 작년 하반기 들어 성장세가 주춤했으나 자본시장법이 개정되면서 다시 불이 붙고 있다.
KB국민은행은 최근 'KB보험금청구권신탁'을 새로 선보였다. 보험사가 지급하는 사망보험금을 사전에 정한 방식대로 유가족에게 지급하도록 은행과 신탁 계약을 체결하는 상품이다. 국민은행은 이번 보험금 청구권 전용 신탁상품 출시로 고객의 보험금을 안전하게 관리하고 다양한 신탁 솔루션을 제공한다는 방침이다. 예를 들어 자녀의 대학 등록금이나 결혼자금 명목으로 보험금을 일정 시기가 지난 시점에서 전달하거나, 거액의 보험금을 장기간에 분할 지급해 유가족들의 안정적인 경제적 자립을 지원할 수 있다.
하나은행도 사망보험금을 신탁 재산으로 하는 유언대용신탁 상품을 내놓았다. 앞서 건설근로자와 영세 건설업자를 보호하기 위해 전자적 대금 지급 시스템 '에스크로 특정금전신탁(노무비닷컴)'을 출시한지 열흘 만이다. 하나은행은 이번 보험금 청구권 신탁을 통해 미성년자와 장애인 등 취약계층의 자산을 안전하게 관리하고, 법적 분쟁 예방 등을 제공한다는 점을 내세웠다. 하나은행은 보험금청구권 신탁 도입 첫날 은행권 처음으로 1호, 2호 계약을 체결해 이목을 끌었다. 하나은행 리빙트러스트센터 관계자는 "보험금청구권 신탁 상품 출시를 통해 손님에게 보다 안전하고 효율적인 자산 관리 솔루션을 제공하게 됐다"고 말했다.
국책은행인 기업은행도 신탁 상품 대열에 합류, 'IBK 내뜻대로 유언대용신탁'을 출시했다. 유언대용신탁은 고객이 은행과의 신탁계약을 통해 금전·부동산 등의 상속자산을 맡기고, 생전에는 본인이 수익자로, 사후에는 계약에서 정한 별도의 수익자에게 자산이 상속되도록 하는 상품이다. 기업은행은 고객이 맡긴 상속자산이 안정적 수익추구가 가능하도록 국채, 만기매칭형 ETF(상장지수펀드), DLB(파생결합증권) 등 다양한 금융상품으로 구성된 포트폴리오를 제공한다. 은행은 또 이번 유언대용신탁을 통해 병원비, 생활비 등 긴급자금이 필요한 경우 일부 중도인출이 가능하도록 했다.
신한금융은 그룹 회장이 직접 신탁 상품 알리기에 나섰다. 지난 9월 신한금융은 사회복지공동모금회와 손잡고 '신한 유언대용신탁'에 가입한 고객들이 향후 자산 상속 시 사전에 정해놓은 비율만큼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기부하는 것을 독려하기로 했다. 진옥동 회장은 "주변 이웃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하고자 하는 고객들에게 기회를 제공할 수 있어 뜻깊게 생각한다. 고객 자산의 안전한 관리와 함께 기부문화 확산을 위한 다양한 노력을 이어 가겠다"고 말했다.
금융권 한 관계자는 "비이자 수익원이 절실한 은행 입장에서 신탁 상품은 새로운 이익 창출원"이라며 "일본 신탁 시장이 GDP(국내총생산)의 2배가 넘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아직 GDP의 절반 수준에 불과한 한국은 성장 여력이 더 많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