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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대면이 일상화된 사회에서 특히 얼굴을 헬멧으로 가린 낯선 사람과의 마주침이 새로운 불안으로 번지고 있다. 이제는 집 앞을 드나드는 배달원과 택배기사조차 경계의 대상이 되는 등 '헬멧 공포증’이 확산되고 있다.
실제로 한 조사에 따르면 택배·배달 이용자 10명 중 6명 이상이 비대면 수취를 선호한다고 답했다. 이유로는 ‘모르는 사람과 마주치는 것이 불편하다’(32.6%), ‘집안이 노출되는 게 싫다’(28.0%) 등이 꼽혔다. 낯선 사람의 방문이 곧 불안으로 이어지는 시대, 배달기사의 짧은 대면조차 ‘위험’으로 지각되는 흐름이 형성되고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 최근 한 아파트가 헬멧 착용을 자제해 달라는 공지를 내거나, 비대면 배달 요청에도 문 앞에 서있었던 배달기사 사연이 온라인에서 논란이 되며 일상적 공간에서도 ‘비대면의 심리’가 갈등으로 번지고 있다.
송파 아파트, ‘헬멧 착용 자제’ 공지 논란

17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잠실 아파트, 배달기사들은 헬멧 벗고 다니라네요’라는 제목으로 아파트 안내문 사진이 공유됐다.
안내문에는 “최근 오토바이·자전거·킥보드 이용자가 헬멧을 쓴 채 아파트 내·외부를 출입해 입주민들이 불안감을 호소하고 있다”며 “입주민의 안전한 주거 환경을 위한 협조 요청”이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관리소 측은 안내문을 통해 입주민들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사람과 엘리베이터를 함께 타면 불안하다"는 민원이 여러 차례 접수됐다며 "안내문은 강제 조항이 아니라 협조 요청 수준”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공지가 온라인에 퍼지면서 찬반 논쟁이 거세게 일었다. 한 누리꾼은 “범죄를 예방하기 위한 조치라면 이해된다”고 했지만, 다른 누리꾼은 “헬멧은 안전장비일 뿐인데 착용만으로 잠재적 범죄자로 보는 건 편견”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배달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헬멧을 벗었다 썼다 하는 것 자체가 위험하고 번거로운 일인데, 마치 우리가 불안의 원인인 것처럼 취급된다”는 불만도 나왔다.
“문 앞에서 10분간 서 있던 배달원… 공포 그 자체”

16일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문 앞에서 배달원이 10분 넘게 머물러 있었다"는 1인 가구 여성의 사연이 퍼지며 또 다른 논란이 이어졌다.
글쓴이는 “항상 ‘문 앞에 두고 가 주세요’라고 요청하지만, 이날은 노크 소리가 들려 확인해보니 배달원이 여전히 문 앞에 서 있었다”며 당시 상황을 전했다. 그는 “화장실에 있다가 10분쯤 뒤에 문을 열었는데, 헬멧을 쓴 채 샐러드를 들고 서 있었다”며 “얼굴도 보이지 않아 너무 놀라 음식만 바고 낚아채 문을 닫았다”고 언급했다. 이어 그는 “주소를 알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신고하기도 망설여졌다”고 덧붙였다.
댓글에는 1인 가구 여성들의 공감이 쏟아졌다. 그들은 일제히 “혼자 사는 여성에게는 이런 상황이 단순한 불쾌감을 넘어 공포로 다가온다”고 언급했다. 다른 이용자들도 “여성 고객이 주문하는 메뉴나 주거 형태로 신상을 유추하려는 사례가 있다더라”, “나도 배달원이 집 앞에서 오랫동안 서 있던 적 있다”는 비슷한 경험담을 남겼다. 일부 남성 이용자들도 “내가 남자라서 덜 무서웠을 뿐, 비슷한 일을 겪으면 불쾌할 것”이라며 공감하기도 했다.
'헬멧 공포증'은 '공포 스크립트'가 작동한 사회적 불안
서울대 곽금주 심리학과 교수는 “배달 기사를 포함한 낯선 사람을 마주칠 때 불안함을 느끼는 것은 사회 전반의 ‘범죄 학습 효과’와 관련이 있다”고 설명했다.
즉 뉴스나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접한 범죄 이미지가 머릿속에 ‘공포 스크립트’로 자리 잡으면서, 비슷한 장면을 마주할 때 자동적으로 경계심이 작동한다는 것이다.
곽 교수는 “헬멧처럼 얼굴이 완전히 가려지는 상황에서는 상대의 감정이나 인상을 파악하기 어려워 긍정적인 감정 전달이 차단된다”며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표정의 빈자리를 스스로 상상으로 채우게 되고, 그 이미지가 대체로 부정적으로 형성된다”고 분석했다. 특히 배달·택배 기사들이 헬멧 등으로 얼굴이 가려진 채 생활 공간의 문턱까지 접근한다는 점이, 일부 시민에게는 ‘익명성에 대한 불안’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전문가는 개인의 불안이 일반화를 거치며 집단에 대한 낙인으로 번진다는 점을 우려한다. 곽 교수는 “최근 범죄 노출 빈도가 높아지면서, 한 사건이 전체 집단에 대한 불신으로 확산되는 ‘낙인 효과’가 사회적 불안을 더욱 증폭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