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김천해, 1936년 8월 검거 후 끝까지 전향거부-일제 패망 후 9년 2개월 만에 석방

2024-09-28

김천해는 1936년 8월 다시 체포됐다. 출소 10개월 만에 다시 감옥에 갇힌 것이다. 김천해는 자전적 기록에 체포 과정과 고문을 당한 상황을 남겼다.

“8월 3일에 이르러 경시청의 의뢰에 의해 오사카부 경찰부의 손에 체포되었다. 다음날은 경시청에 파견된 형사에게 넘겨져 압송되었다. 작년(1935년) 10월 1일에 출옥하여 겨우 바깥 공기를 들이마신 지 10개월도 안 돼 또다시 사로잡힌 신세가 됐다. 경시청은 나의 신병을 도쿄 칸다니시키초(神田錦町) 경찰서에 던졌다. 좌익 노동조합, 독립사상과 공산주의 선전, 인민전선 선전을 목적으로 한 신문발행을 이유로 나는 또 매일 고문을 당했다. (중략) 실로 참학한 고문이었다. 당시 생포된 동지로서 고문을 받지 않은 자는 없없다.” -김천해 자전적 기록 중

김천해는 경찰 수사 때 받은 고문으로 40도 이상의 고열이 발생하면서 매우 위독한 상태에 이르렀다. 김천해는 8개월 뒤 반세쿄(萬世橋)경찰서로 이감된 후에도 8개월을 미결수로 갇혀있어야 했다. 체포 뒤 15개월 지난 뒤인 1937년 11월에 기소가 결정됐고 재판에 넘겨지면서 수가모형무소(巢鴨拘置所)에 수감됐다. 김천해는 도쿄공소원에서 1심 재판을 진행하던 중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된다.

<조선신문> 이운수 편집장 고문사

이운수(1899~1938)는 김천해보다 한 달 빠르게 1936년 7월에 검거된 후 1년 뒤 검찰에 기소됐다. 그런데 체포 직후부터 극심한 고문에 시달려 몸이 쇠약한 상태에서 도쿄구류소에 옮겨 수감됐는데 일단 1938년 3월에 병보석으로 출소하게 됐다. 하지만 고문 후유증이 심해진 상태에서 반년이 지난 1938년 10월에 사망했다.

이운수가 사망한 때는 김천해의 1심이 진행 중인 때였다. 김천해는 <조선일보> 사건으로 함께 기소된 동지들과 재판을 받는 도중에 이운수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김천해의 자전적 기록을 보면 비통한 마음으로 울분을 토하고 있다. 김천해는 이운수가 다른 동지들과 분리돼 외톨이처럼 지냈다 고문으로 사망했다고 적었다.

김천해는 1928년에 체포돼 징역 6년을 선고받았던 조선공산당 일본총국 사건 때 사촌 동생이자 가장 신뢰했던 동지 서진문이 고문으로 사망한 경험이 있었다. 서진문이 요코하마 가하경찰서에서 고문을 겪고 단식투쟁을 했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게 됐다. 그런데 이번에 또다시 소중한 동지를 잃은 것이다.

이운수는 일본총국 재판과정을 함께 했고, 아키타형무소에 수감됐을 때 함께 옥중신문을 발간했다. 출소 후 우리말로 <조선신문>을 발간하자고 결의했던 믿음직한 동지였다. 김천해는 신문발행을 책임진 이운수를 믿고 전국을 돌면서 독자를 만들고 재일조선인운동과 노동자조직 복원에 나설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젠 영영 볼 수 없는 저세상으로 이운수를 떠나보낸 것이다.

징역 4년, 다시 시작한 옥중투쟁과 전향거부

김천해는 1심 재판을 거쳐 1938년 12월 징역 4년이 선고된 후, 기결수로 시가현(滋賀県) 젠쇼형무소(膳所刑務所)에 수감됐다. 동경공소원 항소 재판과 대배심 상고를 진행했지만 결과는 모두 기각돼 4년 형이 확정됐다.

김천해가 갇힌 젠쇼형무소는 오래된 건물로 더럽고 처참한 환경이었다. 시가현이 교토 인근이라 이전 7년을 복역한 아키타형무소와 비교하면 온화한 지역이나 형무소의 겨울은 춥고 습한 기운이 가득했다. 화장실도 하수처리 없이 터를 판 구멍만 있어 구더기가 온 방을 기어 다니고 도마뱀까지 등장했다. 김천해는 이런 수감생활이 일제 경찰의 고문만큼 진절머리가 났다고 토로했다.

조선인 수형자에 대한 처분도 비정상적이었다. 김천해가 수감 중 가장 비참했다고 느낀 사건은 교토 출신 24~25세 청년 김태진이 한겨울에 얼어 죽은 것이다. 절도 초범으로 들어와 정신병이 생겼지만 치료는커녕 1940년 7월부터 다음 해 1월 13일까지 벌거벗긴 채 방치됐다. 김천해는 동포 청년이 병과 추위로 숨을 거두기 전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김천해는 형무소가 사망 과정을 은폐하려 했지만 명백히 살해당한 것이라고 분노했다.

반대로 형무소 측은 김천해를 압박하는 전향 작업을 계속 시도했다. 대표적으로 일제가 중일전쟁에서 태평양전쟁으로 확전하는 가운데 전승을 위해 이세신궁(伊勢神宮)에 참배할 것을 강요했다. 군사 헌금도 요구했다.

김천해는 형무소에 수감된 정치사상범 중 전향하지 않은 이는 자신뿐이라고 밝혔다. 그러니 모두 신사참배에 동원될 때 김천해만 거부한 것이다. 예전 아키타형무소에서는 조선인 동지들 뿐 아니라 일본, 중국 공산당원들이 많아 감옥에서 연대했다면 이젠 완전히 고립된 상황에 놓였다.

김천해는 양말 뜨개질 같은 강제된 노역 수량을 일부러 채우지 않으면서 홀로 옥중투쟁을 했다. 그러자 일제 사법당국은 김천해의 복역 기간이 끝나가던 1941년 12월, 개정된 치안유지법을 내세워 전향거부 사상범 예방구금소가 있던 도요타마(豊多摩)형무소로 이송했다.

김천해 쇠약한 몸으로 예방구금

예방구금은 일제가 1936년부터 ‘사상범 보호관찰령’을 제정해 사상범을 지속적으로 감시 통제한 것에서 출반한다. 이후 일제는 1941년 5월, 치안유지법을 개정해 3장 예방구금 항목을 추가했다. 형기를 다 채워도 재범이 의심되면 석방하지 않는 반인권 조항이었다. 특히 개정 53조를 보면 “예방구금에 부쳐진 자는 예방구금소에 수용 후 개전(改悛)하게 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를 해야 한다”고 적고 있다. 여기서 개전이란 바로 전향이다.

김천해는 이감된 도쿄 도요타마형무소에서 1942년 9월 17일자로 징역 4년을 만기 복역했다. 체포부터 기소 그리고 판결 전까지 미결기간을 합치면 6년을 넘겼다. 하지만 김천해는 비전향을 이유로 만기 석방 대신 예방구금소에 수감됐다. 예방구금은 기본 2년이지만 재판 없이 계속 갱신할 수 있었으니 전향을 거부한 김천해는 사실상 무기한이었다.

김천해가 도요타마로 이송될 때 건강 상태는 최악이었다. 스스로 일어나 걷지 못할 정도였고, 혼자 힘으로 식사를 할 수 없었다. 이 부분은 히구치가 쓴 <김천해 평전>에서 구금소에 함께 수감됐던 일본인 츠지야(土屋祝郞)의 증언으로 알 수 있다. 6척(180cm)을 넘는 큰 키로 근골도 단단해 위풍당당했을 김천해는 오랜 감옥생활로 볼품없이 여위어 두 명의 잡역수가 양옆에서 부축해야 움직였다고 한다. 김천해는 식사와 배변도 혼자서 할 수 없을 만큼 중병을 앓았지만 끝끝내 전향을 거부했다.

도요타마 예방구금소에 수감된 조선인은 김천해 외에 정암우, 이백춘, 김욱일, 송태옥 등이 있었는데 대부분 전협(全協)에서 활동하다 수감돼 전향을 거부한 이들이었다. 중국에서 체포돼 압송된 이강훈(1903~2003)도 있었다. 그는 상해임시정부와 만주 신민부에서 활동하다 주중일본공사 아리요시아키라(有吉明) 암살 시도로 체포됐다. 1933년 11월에 징역 15년을 선고받아 복역하던 중 예방구금소로 이감됐다.

도요타마와 후추의 예방구금소

김천해는 도요타마 예방구금소에서 일본공산당 소속으로 전협 지도자였던 야마베겐타로(山辺健太郎) 등 주변 수형자들의 간호와 조력을 받아 몸을 회복할 수 있었다. 완쾌는 아니어도 혼자 거동할 정도가 됐다.

김천해는 예방구금된 상태에서도 기개를 잃지 않아 구금소 형무관마저 감탄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히구치의 <김천해 평전>을 보면 김천해를 ‘어른(大人)’으로 칭한 젊은 구금소 직원의 증언이 나온다. 대학을 나온 젊은 직원은 김천해가 학자나 법률가처럼 논리적으로 일본 ‘천황제’ 등 정치제도와 침략 정책을 비판한 모습을 보면서 큰 긍지를 느꼈다고 말했다. 김천해가 1944년 12월, 조선총독부에서 온 창씨개명 통지를 끝까지 거부했다는 것도 증언했다. 김천해가 개명을 거부했지만 구금소 당국이 이름을 ‘아사미히데오(朝海英雄)’라고 일본식으로 바꿔 부르자 격분했다면서 ‘김 대인이 사법대신(법무부장관)에게 맹렬한 항의문을 보냈다’고 증언했다.

일제는 패망이 임박한 1945년 6월 하순, 김천해와 이강훈 그리고 일본인 비전향 사상범을 도요타마에서 후추형무소(府中刑務所)로 이감했다. 5월 25일부터 미군 폭격기가 도쿄 공습을 시작하면서 도요타마형무소도 폭탄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다. 일제 당국은 폭탄 피해보다 사상범을 비롯해 수형자들이 탈옥할 것을 더 우려했다. 이는 일본공산당 출신 비전향자가 쓴 회고에서 패전을 앞둔 일제가 학살할 수 있다는 불안감에 빠졌다는 내용에도 드러난다.

일제 패망 후 9년 2개월 만에 석방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패망했다. 김천해는 후추형무소에서 일왕 히로히토의 2차 세계대전 항복 소식을 들었다. 부당한 체포와 징역 선고 그리고 이미 형기를 끝난 뒤에도 예방구금된 김천해. 하지만 예방구금소의 철문은 바로 열리지 않았다. 9월부터 교섭이 진행되고 동지들의 면회와 10월 1일에 국제 기자단의 방문까지 이어졌지만 석방은 미뤄졌다. 김천해는 이때 카프와 재일조선노총 그리고 <조선신문>에 참여했 김두용의 면회를 요청했다. 김두용은 김천해를 만난 후 재일조선인을 규합해 석방 운동에 나선다.

사상범 석방은 10월 2일, 연합군최고사령부(GHQ)가 도쿄에 설치된 후 예방구금제도를 폐지하면서 이루어졌다. 10월 4일, 수감자 석방 명령이 나왔고 6일 최종 결정됐다. 10월 10일, 김천해를 비롯한 사상범 16명 전원이 석방됐다.

김천해는 1936년 8월 체포를 기준으로 무려 9년 2개월 만에 감옥을 벗어났다. 일제강점기 전체로 따져보면 모두 4차례에 장장 16년 9개월을 넘겼던 투옥에 종지부를 찍었다.

배문석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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