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영등포구에 사는 중학생 정유회군(14)은 지난 3일 밤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다가 창문 밖 헬기 소리를 듣고 화들짝 놀랐다. “헬기 소리가 너무 크게 들리는 거예요. 전쟁이라도 난 줄 알았어요.” 정군은 그날 밤 이후로도 머릿속에서 헬기 소리가 울려서 쉽게 잠들기가 어려웠다고 말했다. 지난 9일 국회 앞 촛불집회에서 만난 정군은 “계엄이라고 하니 두 번 다시 밖에 다니지 못할까 무서웠다”며 “피곤한데도 아침이고 밤이고 계속해서 계엄 관련 뉴스를 찾아보게 된다”고 말했다.
‘12·3 비상계엄’ 사태 이후 시민들은 ‘계엄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고 말한다. 시민들은 한밤중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 선포 대국민 담화부터 계엄군이 국회에 들어가는 모습까지 전부 실시간 중계로 봤다. 총을 든 계엄군과 군용 헬기, 장갑차 등을 목격한 시민들은 불안감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우울증을 호소하고 있다. 계엄이 장·노년층에게 과거의 공포를 상기시켰다면 아동·청소년들은 처음 본 초유의 사태에 대해 충분한 설명을 듣지 못해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경기 의정부시에 사는 이모씨(56)는 그날 밤만 떠올리면 몸이 부들부들 떨리면서 눈물이 난다고 말했다. 가족이 국회 안에서 일하는데 혹여나 군인들에게 무슨 일을 당할지 몰라 두려웠다고 했다. 이씨는 “가족과 연락은 안 되고, 계엄군이 국회에 들어가는 뉴스는 나오니 숨이 막히는 줄 알았다”며 “어릴 때 겪은 계엄이 떠오르며 걱정된 나머지 도저히 잠이 들 수가 없었다. 아직도 불안하고 무섭다”고 말했다.
고등학생 김채영양(18)은 “요즘 안전안내 문자 알림 소리만 들어도 깜짝 놀란다”며 “또 다른 비상계엄이 없을 거라고 하지만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는 마음에 신경이 곤두서있다”고 했다. 온라인에선 서울 시내 한 카페에서 사이렌 소리가 울리자 카페 안에 있던 시민들이 전부 “전쟁 난 것 아니냐”며 놀랐다는 글이 공유됐다. “오토바이의 부웅거리는 소리만 들려도 헬기소리 같아 자다가 벌떡 깬다” “뉴스 안 보고 2시간 동안 있으면 무슨 일이 날까 불안해서 영화관을 못 간다” 등 트라우마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는 반응도 이어졌다.
비상계엄 사태 이후 정국 혼란이 계속되면서 집착하듯 계엄 뉴스를 찾아본다는 이들도 있다. 직장인 김수현씨(48)는 지난 4일부터 매일 새벽 2시까지 뉴스를 보다 잠들고, 눈을 뜨고서도 최신뉴스를 ‘새로고침’ 하고 있다고 했다. 김씨는 “여당 정치인들이 자꾸 말을 바꾸고 혹시 또 다른 비상사태가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 때문”이라며 “국민의힘은 ‘탄핵 트라우마’를 운운하는데 정작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건 나라가 40~50년 전으로 돌아갈까 걱정하는 국민들 아니냐”고 말했다.
계엄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선 일상을 지키려는 태도가 중요하다. 뉴스 검색을 자제하는 것도 방법이다. 정찬승 대한신경정신의학회 이사는 “먹고 자고 적절한 활동과 직업 생활 등 정상생활을 유지하는 것이 핵심”이라며 “뉴스를 100배 더 본다고 해서 그만큼 정보를 얻는 게 아니라 불안과 공포만 더 자극하게 되기 때문에 정해진 시간에만 뉴스를 보거나 공신력 있는 매체를 통해서만 보는 게 방법”이라고 했다.
아동·청소년에게는 정치 상황을 알려주지 않는 대신 궁금증을 올바르게 해소할 수 있도록 소통해야 한다고 했다. 정 이사는 “미디어를 통해 접하게 된 갈등, 혼란, 폭력 장면들은 아이들을 불안과 공포에 빠뜨리며, 아이들은 이런 부정적인 감정을 해소하고자 더욱 많은 정보를 얻으려고 한다”며 “아이가 어떻게 알고 느끼고 있는지 들어야 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