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9월 17일 서울 잠실 올림픽 주 경기장. 개막식 시작 2시간여 만에 갑자기 정적이 흐르더니 운동장 한 모서리에서 흰 모자에 흰 티셔츠와 흰 반바지를 입은 소년이 굴렁쇠를 굴리며 나타났다. 소년은 운동장을 대각선으로 가로질러 한가운데에 서더니 굴렁쇠를 어깨에 메고 손을 흔들었다. ‘평화와 화합’의 메시지를 던진 이 장면은 세계인의 공감과 감동을 자아냈고 아직도 88올림픽의 상징으로 회자된다.
굴렁쇠 소년을 연출했던 ‘시대의 지성’ 이어령 교수는 생전에 “‘전쟁고아’, ‘분단국’이라는 한국의 이미지를 쇄신하고 생명을 육성하며, 서양과 다른 공백의 미를 제시하고자 했다”고 했다. 그의 바람대로 이 올림픽은 세계 최빈국이었던 한국이 불과 30여년 만에 한강의 기적으로 일궈낸 발전상을 세계에 알렸다. 한국은 이후 민주화를 거치면서도 성장을 이어갔고 1996년 선진국 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하기도 했다.
세계사적 의미도 크다. 1970년대 뮌헨·몬트리올 올림픽은 테러조직의 선수단 습격과 인종차별로 얼룩졌고 1980년대 모스크바·로스앤젤레스 올림픽도 공산 진영과 자유진영만이 참석해 반쪽짜리에 그쳤다. 하지만 88올림픽은 160개국 1만3000여명 선수단이 참여하며 ‘동서화합의 제전’이자 ‘지구촌평화의 축제’로 치러졌다. 대회 이후 소련이 해체됐고 동유럽의 공산권도 몰락의 길을 걸었다. 88올림픽이 냉전 종식의 밑거름으로 작용했다는 평가도 나온다.
서울시가 그제 2036년 올림픽 유치계획을 공개하며 출사표를 던졌다. 2036년은 88올림픽을 치른 지 48년이 되고 마라톤선수 손기정 선수가 한국인 최초로 금메달을 딴 지 100년이 되는 해이다. 2개월 후 국내 후보 도시가 결정되고 최종 개최지는 2026년 3월쯤 판가름날 전망이다. 현재 인도와 카타르, 인도네시아, 이집트, 튀르키예 등이 경쟁하고 있는데 한국은 유력후보로 거론된다고 한다. 올림픽을 두 번 이상 치른 나라는 미국, 영국, 프랑스, 호주, 그리스, 일본, 독일 등 7국 정도다. 반세기 만의 재유치가 꼭 성사돼 동북아 평화를 안착시키고 경제도 한 단계 도약하는 전기가 마련되길 바란다.
주춘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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