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는 늘 고독한 취미의 대명사였습니다. 퇴근 후 집 안에서, 혹은 카페 구석에서 조용히 책장을 넘기는 행위. 그래서 MBTI ‘I(내향형)’ 사람들의 전형적인 취미. 혹은 딱히 내세울 여가가 없을 떈 무난하게 채워 넣는 한 줄이었죠. 하지만 요즘 독서는 완전히 달라졌어요. 사람들을 끌어모으고, 연결하는 가장 ‘힙한 취향’이 됐습니다. 세간에 회자되는 ‘텍스트힙’(텍스트+힙하다)이라는 신조어가 상징하듯, 지금의 독서모임은 단순한 책 읽기가 아닙니다. ‘생각의 깊이’를 공유하고 진정한 관계를 갈망하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신뢰 기반의 소셜 클럽’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트레바리’‘문토’ 같은 유료 독서모임이 이미 수많은 직장인들에게 나이와 배경을 뛰어넘는 인생 친구를, 때로는 연인을 맺어준 사례를 심심찮게 찾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서울시는 아예 도서관을 무대로 미혼남녀 만남 행사 ‘설렘, 북 나잇’까지 열었어요. 책이 가장 강력하고 신뢰도 높은 ‘만남의 필터’가 된 셈입니다.
화려한 ‘프로필’보다 ‘텍스트’로 연결되는 시대. 우리는 왜 책을 통해 연인을 찾고, 친구를 사귀며, 세대를 뛰어넘는 멘토를 만나고 있을까요. 비크닉이 '텍스트힙'이 만들어낸 새로운 만남의 풍속도를 따라가 봤습니다.

만남의 필터가 된 책…걸러진 인연의 깊이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왠지 모르게 말이 잘 통할 것 같았어요. 소개팅처럼 부담스럽지도 않고, 일단 책으로 한 번 걸러진 사람들이니까요.” 직장인 김민주(32·여)씨는 1년 전부터 매달 한 번씩 소셜 플랫폼 ‘문토’의 독서모임에 나갑니다. 처음에는 자기계발을 위해 시작했지만, 지금은 새로운 인연을 만나는 주요 창구가 됐어요. 김씨는 “원래 ‘I 성향’이 강해서 사람 만나는 걸 즐겨 하지 않았는데, 독서모임은 달랐다”며 “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그 사람의 가치관과 깊이를 알게 돼 자연스레 마음을 열게 된다. 여기서 만난 남자친구와 4개월째 교제 중”이라고 말했습니다.
독서모임은 소개팅의 부담을 줄이고 진정성 있는 관계를 탐색하는 창구로 기능합니다. 단순히 외모나 직업 같은 표면적인 조건이 아닌, 책을 통해 상대방의 가치관과 사고의 깊이를 먼저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죠. 물론 모든 이들이 ‘연애’만을 목적으로 하는 건 아니에요. 김씨는 “연애로 이어지는 사람도 있지만, 단순히 책을 통해 다양한 시각을 나누고 싶은 사람이 더 많다”며 “오히려 ‘진짜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곳이란 점이 매력”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연애만이 답은 아니다”…세대를 넘어 통하는 우정

독서모임에서 맺는 인연은 일반적인 친목 모임이나 소개팅과는 결이 다릅니다. 단순히 외적인 조건이나 가벼운 흥미를 넘어, ‘생각의 스펙트럼’이 통하는지를 먼저 확인하는 과정이 필수적이기 때문입니다.
스타트업 개발자 이준호(38·남)씨는 3년째 독서모임에 참여하며 다양한 세대와 교류하고 있습니다. 이씨는 “업무 특성상 만나는 사람들이 한정적이었는데 책이라는 공통의 주제로 다양한 사람들과 만난다는 게 즐겁고 인생 공부하는 느낌도 들어서 좋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모임에서 자주 보던 분이 50대인데 전직 경찰이셨다. 나이 차가 많이 나지만 이야기가 잘 통해서 ‘인생 멘토’이자 친구가 됐다”고 경험을 전했어요.
다만 이러한 모임에 대한 기대가 커지는 만큼 동시에 고민의 지점도 생겨납니다. ‘책을 읽는 나’를 보여주는 하나의 패션 아이템처럼 소비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죠. 책이 관계를 위한 도구로만 쓰인다면, 과연 그것이 내면을 성장시키는 ‘질적인 독서’일 수 있을까라는 질문은 남습니다. 이에 독서모임을 주최한 호스트 김가연(29)씨는 “직장과 가정에서 벗어난 ‘순수한 지적 욕구’ 기반의 관계는 피로도가 적고 지속성이 높다”며 “책 한 권을 함께 완주하며 얻는 ‘동지애’가 관계의 밑바탕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이어 “몇 년째 꾸준히 참여하는 회원들이 많다”며 “그 꾸준함이 바로 이 문화의 진정성을 증명한다”고 덧붙였습니다.
유료 플랫폼, 관계에 대한 가치 소비

‘책으로 연결되는 관계’에 대한 관심은 이제 숫자로도 드러납니다. 유료 독서모임 플랫폼 트레바리는 최근 누적 회원 11만 명을 돌파하며 매달 약 500개의 모임을 운영하고 있고, 문토 역시 소셜 살롱 운영으로 가입자가 3만명을 넘어섰어요. 뿐만 아니라, 예스24의 독서 커뮤니티 사락은 론칭 1년 만에 2000개 이상의 모임이 개설되는 등 대형 플랫폼을 중심으로 독서 모임이 폭발적으로 확산 중입니다. 적지 않은 비용을 지불해야 하지만 모임은 빠르게 마감되죠. 돈을 내고 책을 읽는 행위가 이제는 ‘진정한 관계에 대한 투자’라는 보편적 문화가 된 겁니다.
이런 흐름을 제도권이 확인한 사례가 서울시의 ‘설렘, 북 나잇’입니다. 도서관을 무대로 한 미혼남녀 만남 행사가 하루 만에 마감된 것은 이미 ‘책으로 만난 연애’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었음을 보여줍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2023년 국민 독서실태 조사(2024년 발표) 결과를 보면 흥미로운 통계가 나옵니다. 성인 종합 독서율은 43.0%로 역대 최저였지만 20대 독서율은 74.5%로 전 연령대 중 가장 높았습니다. 책을 읽는 행위 자체가 희소해진 시대, ‘책을 읽는 사람’이라는 공통점은 가장 강력한 인연의 시작점이 되고 있습니다.
독서모임의 중심은 여전히 ‘한 공간에서 마주 앉아 이야기하는 시간’이지만, 그 방식은 점점 더 다채로워지고 있습니다. 오프라인의 온기를 그대로 옮겨온 듯한 온라인 독서모임이 대표적입니다. 특히 ‘줌(Zoom)’을 활용한 비대면 모임은 낯선 사람을 직접 만나는 데 대한 부담을 줄이면서도, 생각을 나누는 본질적인 경험은 그대로 이어갑니다. 화면을 사이에 둔 거리감이 오히려 말문을 트이게 하기도 하죠.
심리명상 관련 온라인 독서모임의 모임지기인 이선아(32)씨는 “대면 모임보다 훨씬 편하다. 카메라를 켜지 않아도 되고, 책 이야기 자체에 집중할 수 있어서 좋다”고 말했습니다. 사회적 피로감이 큰 시대, 온라인 독서모임은 ‘익명성 속의 연결’이라는 새로운 방식을 제안합니다. 직접적인 시선 교환 없이도 생각이 닿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또 하나의 관계 실험인 셈입니다.
이러한 흐름은 출판업계의 전략까지 바꾸고 있습니다. 신간 마케팅의 중심에 ‘북클럽 협업’이 들어가고, 독자와 저자를 직접 연결하는 ‘작가와의 북토크’는 책 판매량을 끌어올리는 효과를 냅니다.
경계 없는 확장, ‘퓨어한’ 만남의 트렌드

독서모임은 현대 사회의 새로운 관계 방식을 보여줍니다. 나이·직업 관계 없이 오직 책을 매개로 생각과 가치관만을 주고받는 자리니까요. 특히 유료 모임의 ‘강제성’은 오히려 장점입니다. 돈을 내고 독후감을 써야 하는 책임감 덕분에 대화는 더 진지해지죠. ‘묻지마 모임’에서 흔히 발생하는 시간 낭비와 관계 소모를 줄이고, 만남의 질을 높입니다. 책을 통해 “나는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다”라는 자기 필터링을 거친 뒤 모이는 사람들이니, 탐색 과정은 훨씬 짧아집니다.
이러한 독서 모임에 대해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현대인들은 수많은 가벼운 관계 속에서 정작 자신의 내면을 깊이 드러낼 수 있는 관계에는 심각하게 목말라 있다”며 “데이팅 앱이 외모 등의 조건을 먼저 보게 한다면, 독서모임은 생각과 가치관을 먼저 보게 한다. 텍스트를 통해 호기심과 태도를 미리 엿본 뒤 만남을 시작하기 때문에 감정 소모는 줄고, 관계는 더 빠르게 깊어진다”고 분석했습니다.
읽고, 공감하고, 연결되는 사람들
이 흐름은 한국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전 세계에서도 ‘책을 매개로 한 관계의 재발견’은 하나의 문화로 자리 잡고 있어요. 미국의 ‘사일런트 북클럽(Silent Book Club)’이 대표적이죠. 55개국 300여 도시에서 운영되는 이 모임은, 지정된 도서도 토론 의무도 없습니다. 각자 읽고 싶은 책을 가져와 조용히 읽다가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방식이에요. 이는 독서가 ‘고독한 행위’에서 ‘공유하는 경험’으로 진화하는 최전선을 보여줍니다. 참가자들은 부담 없이 모여 ‘함께 읽는 고요’를 즐기며, 책을 통해 진정한 연결고리를 찾는 현대인의 관계 방식과 놀랍도록 닮았습니다.
짧은 유행이라 단정할 수도, 고독한 취미라 정의할 수도 없는 지금의 독서는 여전히 자신만의 방향으로 깊고 단단하게 이어지고 있어요. 이제 독서는 ‘책으로 연결되는 신뢰의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우리 시대의 가장 깊고 새로운 만남을 만들어가고 있죠. 책으로 시작된 이 ‘텍스트힙’의 시대, 당신은 오늘 누구를 만나기 위해 책장을 넘기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