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리하면 나잖아”···현역 장성 조종한 민간인 노상원의 ‘가스라이팅’

2025-03-20

지난해 3월 2024년 상반기 진급 심사를 한달 가량 앞둔 시점, 구삼회 당시 육군 2기갑여단장(준장)은 큰 기대 없이 차분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육군사관학교 50기 동기생 다수가 이미 별 두개를 달고 국방부나 육군본부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그 전 해 3차 소장 진급심사에서도 떨어진 구 전 여단장은 이젠 자기에게 기회가 오지 않을 거라고 여겼다.

“통상 군에서 3차 진급심사 탈락을 하면 마음을 많이 내려놓고 생활합니다.” 구 전 여단장이 지난해 12월 검찰조사에서 검사에게 한 말이다. 그렇게 낙담한 채 마음을 비우고 있던 때, 생각조차 못 했던 사람에게서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나 노상원이야. 왜 그동안 연락 한번 안 하냐? 의리 없는 놈.”

구 전 여단장이 전 정보사령관 노상원씨(육사 41기)와 통화한 건 이날이 2015년 이후 처음이었다. 노씨는 구 전 여단장을 나무라고는 다짜고짜 진급 얘기를 꺼냈다. “의리 없이 전화도 한번 안 하는 놈이지만 존경하는 큰 형님 김근태 사령관님이 부탁했으니까 할 수 없이 도와준다. 잘 들어. 내가 아는 사람들이 많아. 김용현하고도 잘 알아. 네가 왜 진급이 안되는지 알아보고 연락할게.” 김근태 예비역 대장은 2000년대 후반 제1야전군사령관을 지냈다. 구 전 여단장은 그 당시 김 사령관을 통해 노씨를 처음 알게 됐다고 검찰에 진술했다.

9년 만에 노씨로부터 걸려 온 전화는 평온하던 구 전 여단장 마음에 작은 불씨를 지폈다. 노씨에게서 다시 전화가 온 것은 며칠 뒤였다. 기록이 남지 않는 텔레그램 통화였다. “알아보니 네가 진급이 안되는 건 지작사(지상작전사령부) 작전과장할 때 평가가 너무 안 좋아서래. 밑에 애들 괴롭혔냐? 갑질이라고 하더라. 야, 갑질은 절대 진급 안 돼.” 노씨는 구 전 여단장의 속을 실컷 긁은 뒤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하, 그래도 큰형님이 부탁하니 내가 적극 소명해줄게. 이제 또 갑질하면 안 된다.”

12·3 비상계엄하에 군을 동원해 부정선거를 수사하려 했던 윤석열 대통령과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은 비공식 수사조직 ‘제2수사단’을 만들 계획을 세웠다. 수사단장 자리에는 구 전 여단장, 부단장엔 방정환 당시 국방부 전작권전환TF장(준장)을 임명시키려 했다. 검찰은 그 배후에 실질적으로 2수사단을 지휘하려 했던 노씨가 있다고 본다. 노씨는 문상호 당시 국군정보사령관과 2수사단 간부들을 지난해 12월1일과 3일, 이틀에 걸쳐 경기도 안산 자기 집 근처 햄버거 가게로 불러 지시를 내린 것으로 조사됐다.

2018년 정보사령관 재임 시절 부하 여군을 성추행해 실형까지 살고 나온 노씨는 현역 때부터 군에서 따르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노씨에게 휘둘려 직·간접적으로 2수사단 구성에 연루된 장성급 인사들도 검찰 조사에서 노씨에 대해 “평판이 안 좋아 멀리했다”고 진술했다. 그런데도 이들이 노씨의 지시를 거절할 수 없었던 것은 그가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과의 친분을 거론하며 진급을 미끼 삼았기 때문이다. 노씨는 2수사단을 구성하면서 진급이 어려워졌거나 문제를 일으켜 자리조차 보전하기 힘든 군 간부들에게만 접근했다. 그리고 그들을 상대로 수개월에 걸쳐 ‘작업’을 했다.

지난해 6월 ‘정보사 군무원 블랙요원 명단 유출 사건’이 발생한 정보사 2사업단의 정성욱 단장(대령)도 노씨의 ‘타깃’이 됐다. 정 전 단장은 지난해 8월부터 3개월간 직무분리 명령을 받고 업무에서 배제됐다. 노씨가 정 전 단장에게 처음 접근한 시점이다.

노씨는 마침 공석이던 정보사 산하 100여단장(준장) 자리를 미끼로 던졌다. 군사특기가 ‘인간정보’인 정 전 단장이 오를 수 있는 유일한 장군 자리였다. “전역이 얼마나 남았냐? 진급해야지. 김봉규가 선배니까 먼저 진급하고 다음에 네가 하면 되겠네. 내가 잘 도와줄게. 내가 장관이랑 잘 아는 사이야.” 텔레그램 전화였다. 김봉규 당시 정보사 중앙신문단장(대령)도 비슷한 시기에 같은 취지의 전화를 받았다. 김 전 단장은 상급자인 문 전 사령관보다도 육사 기수가 높아 사실상 승진이 어려운 상태였다. 둘은 각각 2수사단 수사3부장과 2부장으로 임명될 예정이었다. 노씨는 이들에게 100여단장직을 거론하며 2수사단 요원 40명을 직접 선발하도록 했다.

노씨의 호언장담과 달리 구 전 여단장은 지난해 4월 네번째 소장 진급심사에서도 탈락했다. 오히려 노씨는 구 전 여단장을 더 몰아세웠다. “너 구타도 했냐? 구타도 있다고 하던데.” 달래기도 했다. “조금 더 노력해보자. 네가 2기갑여단장으로 가선 잘하고 있다던데, 지작사 근무할 때 너무 까여서.” 그러면서 ‘다음 기회’를 언급했다. “내가 누구냐. 의리하면 나잖아. 내가 어떻게든 소명해줄 테니 걱정 말고.”

노씨는 자신의 공작망에 걸려든 군 간부들에게 진급 로비에 쓴다며 돈도 뜯어냈다. 구 전 여단장은 “노씨가 ‘대통령실 공직기강 담당자가 버틴다’며 ‘총대를 메고 구워삶을 테니 5장(500만원)을 준비하라’고 말했다”고 검찰에 진술했다. 구 전 여단장은 “그렇게까지 진급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며 주저했지만, 노씨가 “눈 한번 감고 지나가면 ‘쓰리스타’까지 문제가 없다”고 말하자 거부하지 못했다. 검찰은 비슷한 수법으로 노씨가 김 전 단장에게서도 2000만원을 받아냈다고 본다. 노씨가 이 돈을 실제 진급 로비에 썼는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구 전 여단장은 지난해 11월25일, 다섯번째 소장 진급심사에도 떨어졌다. 이번엔 진급심사 직전에 노씨가 먼저 연락해 탈락 사실을 전했다. 노씨는 그러면서 낙담한 구 전 여단장에게 알 수 없는 얘기를 꺼냈다. “장관님이 삼회 너는 귀하게 쓰실 생각이 있다고 하시더라. 조만간 다른 좋은 소식이 있을지도 몰라.”

비상계엄 선포 사흘전인 지난해 11월30일, 구 전 여단장은 다시 노씨의 전화를 받았다. “장관님이 조만간 국방부에 파견명령 내서 너를 부르신다고 하더라. 국방부 와서 일하려면 며칠 입을 옷가지도 준비해야겠지. 파견 오면 바로 집에 못 갈 수도 있잖아.” 하루 뒤 노씨에게 걸려온 전화는 좀 더 의미심장했다. “이제 됐어. 3~4일 내에 파견명령을 내서 부르신다고 하셨어. 전화 대기 잘하고. 삼회야, 이번이 마지막 기회다.”

노씨에게 수개월에 걸쳐 ‘가스라이팅’을 당해 온 장군들과 대령들은 지난해 12월3일 오후 5시쯤 경기도 판교 정보사 100여단 본부에 모였다. 구 전 여단장도 이날 오후 안산시 햄버거 가게에서 방 전 TF장과 함께 노씨를 만난 뒤 판교로 이동했다. 이들의 검찰 진술을 종합해보면, 당시 햄버거 가게에서 노씨는 “합동수사본부 수사단이 구성되는데 구 장군이 단장, 방 장군이 부단장을 맡으면 된다”며 “상황을 종합해서 장관께 보고하는 임무를 수행하면 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판교 정보부대에 가서 명령을 확인한 후 임무를 수행하라”고 지시했다.

검찰은 노씨가 진급을 미끼로 군 장성과 대령들을 2수사단 구성에 이용했지만 이들을 실제로 진급시킬 생각은 없었다고 판단한다. 오영대 국방부 인사기획관은 지난해 12월 검찰 조사에서 “12월2일부로 정보사 100여단장 자리에 정용길 준장이 가기로 돼 있었다”고 진술했다. 오 기획관은 “그런데 11월29일 20시경 김 전 장관이 전화하더니 ‘보직 교체를 12월24일로 연기하라’ 지시했다”고 말했다. 김 전 단장과 정 전 단장 등은 이 사실을 모른 채 100여단장을 꿈꾸며 비상계엄 당일까지도 노씨 지시를 충실히 따랐다.

구 전 여단장은 정보사 100여단 정 전 단장 사무실에서 윤 대통령이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것을 지켜봤다. 이후 3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국회가 비상계엄 해제 요구안을 의결했다. 그때까지도 인사명령을 기다리던 구 전 여단장은 노씨에게 전화를 걸어 임무를 물어봤다. 노씨는 “아휴, 이제 됐다”며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구 전 여단장은 이후 몇 번 더 전화를 걸었지만 다시 노씨와 통화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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