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와대 습격 사건 전말: 서울에 나타난 바바리코트 사내들

2025-02-11

북한 최정예 특수부대 124부대의 창설 배경

출처 - <더 중앙>

1967년 4월, 민족보위성 정찰국은 위대한 수령 동지의 지령을 이행하기 위해 특수부대를 창설했다. 이들의 주 임무는 38선을 넘어 남한 정부 주요 요인 암살 및 기관 폭파 등이었다.

인간병기들로 구성된 124 특수부대 2,400명 중 최정예 부대원 31명을 선발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남한 최고위층 암살 임무를 맡게 될 이들은 25세 전후의 미혼 남성 중에서 선발되었다. 임무를 완수하기에 한 집안의 가장은 부적합 요건이었다.

특수부대원 중에서도 최강의 전투력을 갖춘 31명에게 부여된 임무는 남북한뿐만 아니라 세계정세를 뒤흔들 극악무도한 것이었다.

“남한 괴뢰정부의 수괴 박정희의 목을 따와라.”

출처 -

시행일은 대학 입학시험 전날이자, 설 명절을 앞둔 1968년 1월 21일 일요일 밤으로 정해졌다. 온 국민의 관심이 분산되고 마음이 느슨해지는 일요일은 여러모로 적당한 날짜였다(북한은 625전쟁도 일요일에 기습적으로 감행하여 큰 효과를 본 바 있다). 최종 목표인 남한의 대통령도 반드시 청와대 관저에 머물 것으로 판단했다.

124 특수부대 최고의 암살조는 북한 모처에 청와대 모형 건물까지 제작하고 사전 시뮬레이션을 반복했다. 수뇌부가 내린 최종 결론은 5개 조가 동시에 작전을 실행하여 5분 안에 작전을 마무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암살조의 작전 계획은 다음과 같다.

1조: 청와대 본 청사 2층으로 침입하여 대통령을 암살한다.

2조: 청와대 1층을 점령한다.

3조: 경호실을 점령하여 경호원을 전원 사살한다.

4조: 비서실을 점령하여 전원 사살한다.

5조: 못이 박힌 방망이로 청와대 보초를 제거하고 차량을 탈취한다.

청와대 전경

출처 - <청와대재단>

작전 개시

D-4일, 1월 17일 20시. 계급장 없는 국군 복장을 한 31명의 암살조는 개성에 모였다. 한 번에 무려 30발 발사되는 PPS-43 소련제 기관단총과 추운 날씨에도 뛰어난 성능을 보이는 TT-33 권총, 대전차 수류탄과, 1,200개가 넘는 파편이 발생하여 자살에 용이한 F1 수류탄과 단검을 지녔다.

“손가락을 깨물어 혈서를 쓰자. 작전 실패는 곧 죽음이다.”

인간의 육체적 한계를 초월하는 고된 훈련을 반복한 대원들의 눈은 이미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요식행위에 불과한 혈서를 쓰는 일에서도 살의가 느껴졌다.

개인 가방 무게는 30킬로에 육박했다. 망원경과 지도, 양복과 캔버스화, 손목시계 등이 들어 있었다. 침투 도중 산에서 불을 피워 음식을 해 먹을 수 없었기 때문에 식량은 소금과 말린 오징어, 엿이 전부였다.

온몸에서 살기를 뿜으며 강한 의지로 무장한 암살조는 21시에 개성에서 출발해 23시 DMZ 남방한계선에 도착했다.

첫 번째 장애물은 3미터 높이의 철조망이었다.

“미세한 소음도 발생해서는 안 된다. 천으로 조심스럽게 감싼 후 최대한 느리게 철조망을 잘라라.”

31명 전원이 철책을 넘어선 후, 잘린 철조망까지 완전히 보수를 마친 뒤에야 그들은 임진강으로 향했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움직였다.

1월 18일 22시, 두 번째 장벽인 임진강에 도착했다.

임진강의 폭

출처 - <경향신문>

얼어붙은 강을 도강하기 위해 겨울을 택했지만, 추위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다. 어두운 밤 암살조 전원이 머리에는 흰 붕대를 감고 몸은 흰 천으로 위장했다. 하지만, 300미터에 이르는 강을 눈에 띄지 않고 건너는 일은 도박에 가까웠다. 청와대는 고사하고 파주에 도착하기 전에 발각되어 허무하게 사살되거나 어쩌면 엄동설한 추위에 얼어 죽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최대한 경비병 눈에 띄지 않게 느리게 이동한다. 기침이 날 경우를 대비해 소금을 손에 쥐고 있어라. 전원 도강”

얼어붙은 강바닥을 기어가다 조금의 인기척이라도 들리면 한 시간씩 움직이지 않았다. 단순해 보이지만 인간의 육체적, 정신적 한계를 동시에 뛰어넘어야 하는 작전이었다.

도보 이동은 밤 9시부터 다음 날 새벽 5시까지 이루어졌다. 도로는 물론, 마을도 거치지 않으며 오로지 산을 통해서만 이동했다. 그 와중에도 당일 최상의 몸 상태 유지를 위해서는 휴식이 필요했다. 추위를 이기기 위해 무덤을 파헤쳐 관 옆에서 잠을 청했다.

19일 05시,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전원 파주 초리골의 삼봉산에 도착했다.

파주 초리골 풍경

출처 - <파이낸셜 뉴스>

그리고 휴식을 취하던 북한 특수부대의 최강 암살조는 남한 잠입 성공 후 가장 큰 위기를 맞이한다.

삼봉산 깊은 곳에서 휴식을 취하던 오후 2시 무렵, 그들 앞에 나타난 복병은 나무꾼 사형제였다. 친형제와 사촌으로 이루어진 이들의 임무는 나무를 하는 것이었는데 하필이면 북한 최강의 부대와 눈이 마주친 것이었다. 당황하기는 북한특수부대도 마찬가지였다.

국군복을 입었지만, 계급장도 없고 행동거지에 수상함을 느낀 형제들은 지게를 버린 채 줄행랑을 쳤지만 얼마 가지도 못하고 특수부대 총 조장 김종웅과 김신조 대원에게 잡혔다. 나무꾼 형제는 말로만 듣던 북한 괴뢰군에 죽을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남한의 대통령을 죽이기 위해 남파된 북한 암살조가 나무꾼 형제들의 처리를 놓고 내분이 일어난 것이다.

“임무 도중 만난 민간인은 무조건 사살해야 하오.”

“우리가 여기 불쌍한 남조선 인민들을 죽이러 온 것이오? 우리의 최종 목표는 남조선 인민들을 해방시켜 다 같이 잘 먹고 잘살자는 것 아니오?”

토론이 길어지자, 북한에서 철저한 사상교육으로 남한의 청년들을 오히려 불쌍하게 여긴 일부 대원은 자기 비상식량인 오징어와 엿을 나눠주기도 했다.

“투표로 결정한다.”

북한의 특수부대원들은 나무꾼 형제를 앞에 두고 죽일지 살릴지, 거수투표로 결정하기로 했다. 상당히 친인민적인 발상이다. 특수 부대원의 숫자를 항상 홀수로 구성하는 이유이다. 결과는 반드시 나올 것이며 이를 지켜보는 나무꾼 형제들의 속은 타들어 갔다.

거수 결과는 18대 13.

“남조선 청년들 이리 오라. 여기 공산당 입당서에 서명하라. 너희는 이제부터 혁명당원이다. 우리가 남조선 대통령의 목을 따고 6개월 후에 다시 돌아와 통일되면 너희는 끼니 걱정은 물론이고 대학도 다닐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자네들이 산을 내려가서 신고한다면, 우리는 너희 가족까지 모두 죽여버릴 것이다. 우리는 북한에서도 최고의 특수 부대원이다. 알아들었나? 그리고 여기 선물이다.”

“정...... 정말...... 살....... 살려 주시는 겁니까? 선....... 물은 괜찮습니다.”

나무꾼 형제는 북한 특수부대원에게 생포되었지만, 목숨도 구하고 세이코 시계까지 선물 받은 뒤 산 아래로 줄행랑을 쳤다.

한편 집으로 올 시간이 한참이나 지난 시각, 넋이 나간 얼굴로 돌아온 아들에게 나무꾼 아버지가 물었다.

“네 놈들 얼굴이 왜 그 모양이냐? 산에서 애먼 짓 하다 온 거야? 무슨 일인지 말해 보거라. 괜찮다. 이 아비가 다 해결해 주마.”

(귀신도 때려잡을 것 같은 북한 특수부대원을 아버지가 무슨 수로 해결합니까...)

그러나 누구도 쉽게 대답하지 못했고, 사형제는 깊은 고뇌에 빠졌다.

(신고하면 북한특수 부대원들이 나중에라도 반드시 우리 가족 전부를 죽이러 올 것이다. 그러나 신고를 안 한 것이 발각되면 남한 경찰에게 처벌받을 것이다. 더군다나 나라에 큰 변고가 생길지도 모른다. 그런데 무장 공비는 무자비한 놈들인 줄 알았는데 나 같은 사람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는데 심지어 어떤 사람은 형같이 느껴졌다. 내가 신고하면 그 사람들이 다 죽을지도 모른다. 아! 차라리 내가 산에서 죽어 버렸으면... 아니지. 장가도 못 갔는데...)

나무꾼 형제는 심오한 고심 끝에 인근 경찰서를 찾았다. 신고가 접수된 즉시 한국군의 추격이 시작되었다. 전군에 비상경계령이 떨어졌고 파주를 시작으로 경기도 전체에 걸쳐 면밀한 수색이 시작되었다. 포위망은 점점 좁혀졌다. 국방부 장관은 대통령에게 31명의 암살조는 이제 독 안에 든 쥐라고 보고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어디에서도 북한 특수부대의 행방을 찾을 수 없었다. 심지어 공군에서 동원한 헬기로도 암살조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1968년 1·21 사태 당시 무장 공비 소탕 작전에 투입된 군인들

출처 - <대한뉴스 제659호(1968년 1월 26일)>

최초 신고 이후 출동이 늦었을까? 혹시 나무꾼 형제의 신고를 예상하고 북으로 다시 돌아간 걸까? 하늘로 솟은 것이 아니라면 땅을 파고 숨어버린 것일까?

1월 21일 05시. 수상쩍어 보이는 31명의 사내가 어디선가 나타나 청와대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바바리코트와 캔버스화 차림이었다. 도대체 이들은 어떻게 한 명의 낙오자도 없이, 심지어 단 한 번의 검문도 받지 않고 서울 시내로 진입할 수 있었을까? 나무꾼 형제의 목숨 건 신고도 수포로 돌아가고 마는 것일까? 북한 최정예 124 특수 부대의 서울 진입 성공 비밀은 다음 편에서 이어진다.

<계속>

슈퍼팩토리공장장이 이제와서(?!?!)

유튜브를 시작했다.

기나긴 역사 중 흥미로운 주제를 집어

한 편 한 편 이야기로 엮는다.

필요할 때는 스스로 재연(?!)하는데,

가서 허접한 연기를 비웃어주자...!

유튜브 채널 <기묘한 한국사> 링크

필자의 지난 책들

1. 찌라시 한국사 (링크)

2. 찌라시 세계사 (링크)

3. 나 아직 안 죽었다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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