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증권거래소가 위치한 월스트리트는 명실상부 글로벌 최대의 금융센터다. 하지만 미국 은행가의 모습은 200년 전만 해도 오늘과는 판이했다.
1832년 앤드루 잭슨은 중앙은행 폐지를 공약하며 대선에서 압승했다. 국채를 상환하고 중앙정부의 은행감독 기능을 약화시켰다. 잭슨의 비호하에 각 주에서 일반은행이 급성장했다. 하지만 민간은행이 중구난방으로 화폐를 찍어내 유통하자 큰 혼란이 일어났다.
은행은 화폐 발행을 남발하기 일쑤였고 도산하면 그 화폐가 휴짓조각이 됐다. 뱅크런도 빈발했다. 신용도가 낮은 일부 은행이 발행한 돈은 액면가도 인정받지 못하고 들고양이 취급을 받았다. ‘와일드캣 뱅킹’이라 불린 금융의 혼돈시대였다.
금융 혼란은 30여 년이 지나 링컨(사진) 대통령에 이르러서야 종식됐다. 당시 미국은 내전 상태였다. 1861년 노예제와 관세 인상을 둘러싼 이견으로 나라가 둘로 갈라졌다.
이를 용인할 수 없었던 링컨 대통령은 즉각 군대를 파견했다. 엄청난 전사자를 낸 남북전쟁이 북미대륙을 휩쓸었다. 전쟁을 치르느라 국고가 바닥을 드러내자 링컨 대통령은 연방정부에 ‘그린백’이라는 채무증서를 발행하도록 했다.
이 채무증서는 정부가 가치를 보증하는 국채와 유사했지만, 이자를 지급하지 않아 지폐와 같았다. 이 지폐는 서서히 법정화폐로 자리 잡았다. 각 주가 인가한 일반은행의 화폐에는 10%에 달하는 고율의 세금을 부과했다. 중앙정부가 발행한 화폐만이 유일한 돈으로 인정되었다.
연방 재무부 안에 통화감독청(OCC)을 설치해 은행을 감독하게 했다. 금융권력이 전쟁을 거치면서 중앙정부로 복귀했다. 설상가상 링컨은 1862년 계엄령을 선포했다. 영장 없이는 체포·구금할 수 없다는 인신보호청원(habeas corpus) 제도를 유예했다. 계엄령하에서 수천 명이 넘는 반정부 인사가 체포되었다.
징집에 반대하거나 연방의 존재를 비방하고 남부연합에 찬동하거나 전쟁 수행을 약화시키는 언론인이나 정치인이 주요 대상이었다. 링컨은 무자비하고 무관용한 리더의 모습을 보였다. 그 때문이었을까? 종전 후 그는 암살당했다.
그렇다고 링컨을 독재자라 칭하는 역사가는 찾아보기 어렵다. 역대 대통령 평가에서 링컨은 단연코 1등을 차지한다. 계엄령이 전시 상태에서 필수불가결하게 발령되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링컨은 통화를 통합하고 대륙횡단철도를 건설하는 등 경제 분야에서도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국가를 위하느냐, 사익을 위하느냐에 따라 계엄령에 대한 평가는 달라진다.
김성재 미국 퍼먼대 경영학 교수·『페드시그널』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