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센티멘탈리스트로 폄훼되었던 시인 박인환
풍성한 서사와 감성, 탁월한 운율까지 갖춘 시
여류작가가 말을 걸어올지도 모르는 겨울의 입구
[서울=뉴스핌] 오광수 문화전문기자 =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세월은 가고 오는 것
한때는 고립을 피하여 시들어가고
이제 우리는 작별하여야 한다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늙은 여류작가의 눈을 바라다보아야 한다
…… 등대에……
불이 보이지 않아도
거저 간직한 페시미즘의 미래를 위하여
우리는 처량한 목마 소리를 기억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두 개의 바위 틈을 지나 청춘을 찾은 뱀과 같이
눈을 부릅뜨고 한 잔의 술을 마셔야 한다
인생은 외롭지도 않고
거저 잡지의 표지처럼 통속하거늘
한탄할 그 무엇이 무서워서 우리는 떠나는 것일까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 박인환(1926∼1956) 시집 '목마와 숙녀'(부크크).
가을이 저만치 멀어지는 즈음에 생각나는 시는 여럿일 것이다. 그러나 '목마와 숙녀'처럼 강렬한 시편이 어디 있을까?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그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는 시구(詩句)만으로도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많은 문학 청년들이 '술병이 바람에 쓰러지는 소리를 들으며' 밤을 새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 박인환은 지나친 센티멘털리스트로 폄훼되어 왔다. 치기 어린 문학 청년들은 이 시를 소녀들이 노트 귀퉁이에 적어놓고 외는 시로 치부했다. 박인환은 불과 서른 살의 나이에 사흘간 술을 마신 끝에 심장마비로 세상과 작별했다.

다시 찬찬히 그의 시를 읽어보면 풍부한 서사와 감성이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조화를 이루면서 탁월한 운율까지 갖췄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길지 않은 생의 시간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감성이 없는 삶은 얼마나 메마른 삶인지 가르쳐준 로맨티스트였다.
그리고 시인은 '가을바람 소리는/ 내 술병 속에서 목메어 우는데', 모르는 사이 우리 모두가 성큼 겨울 속에 있음을 깨닫게 한다. 조용히 '목마와 숙녀'를 암송하다 보면 늙은 여류 작가가 말을 걸어올지도 모르는 가을의 끝, 겨울의 초입이다. oks34@newspi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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