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구 표면은 육지와 바다로 구분되는데, 인간의 활동은 육지에서 이뤄지는 것이 압도적으로 많다. 따라서 바다는 육지보다 자연 상태로 남아있는 곳이 많다.
식량 획득 방법만 보더라도 이제 육지에서는 수렵-채집이 거의 사라지다시피 했다. 얼마 전까지 채집 대상이던 나물류까지 경작 쪽으로 계속 넘어오고 있다. 수산물도 양식업이 늘어나고는 있으나 아직도 수렵(어로)-채집 형태가 큰 비중을 지키고 있다.
그런데 어로 작업도 전보다 공격적인 형태로 바뀌어 가고 있다. 대표적 형태가 저인망어업(trawling)이다. 범선시대인 19세기 초에 나타났는데, 동력선의 발달에 따라 계속 확장되어 지금은 전 세계 어획량의 절반 이상이 저인망으로 이뤄지고 있다.
‘저인망(底引網)’이란 말 그대로 바다 바닥을 훑는 방식이다. 수십 미터 깊이의 바다 바닥 중에는 조류에 의한 교란도 인간에 의한 교란도 심하지 않은 곳이 많다. 그런 곳에는 수백 년 전에 가라앉은 배가 곱게 보존되어 있다가 어느날 발견되어 타임캡슐 노릇을 하기도 한다. 저인망어업의 확장에 따라 그런 발견이 잦아졌다. 신안 해저유물이 발견된 1970년대도 한국의 저인망어업이 늘어나고 있을 때였다.
저인망어업이 불러낸 해저의 타임캡슐
제프리 건의 〈상상의 지리학〉(2021) 제8장에는 (182-193쪽) 인도양에서 발견된 해저유물의 주요 유적이 소개되어 있다. 다른 책에서 눈에 띄어 하나씩 소개한 사례도 있지만 동남아 해역의 여러 유적을 나란히 놓고 보면 동남아 역사 연구에 대한 해양고고학의 공헌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고고학은 과거를 탐구하는 학술인데 문헌을 통해 과거를 탐구하는 일반 역사학과 달리 유물을 통해 탐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문헌이 존재하지 않는 선사시대의 연구에서 압도적 중요성을 가진다. 그러나 문헌이 존재하는 시대의 연구에도 고고학적 방법의 연구가 독특한 공헌을 할 수 있다. 역사고고학(historical archaeology)의 영역이다.
역사고고학의 중요한 성과가 사막과 같은 인구 희박 지역에서 나온 사실이 주목된다. 돈황 문서를 비롯해 많은 연구자료가 중앙아시아 사막지대에서 발견되었다. (문헌 자료라도 일반적 전승방법을 벗어나 우발적으로 발견된 자료는 고고학 자료로 볼 수 있다.) 사막지대는 교란의 위험이 적어서 꽤 많은 자료가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해저도 비슷한 조건이다.
동남아 해역에서는 8세기 이후의 난파선이 많이 발견되었다. 그 이유는 선박의 크기와 화물의 성격에 있다. 그 전에 다니던 작은 배들은 흔적을 많이 남기지 않아서 발견되기 힘든 반면 8세기 이후의 배들은 덩치도 크고 오래 보존되는 화물을 많이 싣고 있었다.
대표적인 유물이 도자기다. 도자기는 수중에서건 어디서건 화학적 변화를 겪지 않는 특성을 가졌을 뿐 아니라 8세기 이후 해상교역에서 큰 비중을 가진 품목이었다. 발굴된 선박의 크기로 볼 때 도자기의 적재량 비중이 절반을 훨씬 넘는 것이 보통이었다.
도자기를 “차이나”라고 부르게 된 이유
당나라 때 기술적으로나 미학적으로나 최고 수준의 자기가 형요(荊窯), 월요(越窯) 등 형태로 나타나면서 도자기가 중국을 대표하는 상품이 되었다. (고급 도자기를 서양에서 “china”라고 부르게 되었다.) 동남아-인도양의 난파선에서 인양된 도자기의 성격과 수량에서 침몰 당시의 교역 상황을 이해하는 열쇠를 많이 찾을 수 있다.
수마트라와 보르네오 사이에서 발견된 벨리퉁 난파선을 앞서 소개한 바 있다. (제28회,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80678) 830년경 침몰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배에서는 약 6만 점의 도자기와 여러 가지 값비싼 공예품이 발견되었다. 큼직한 금배(金杯) 등 공예품의 수준으로 보더라도 이 배가 대단한 보물선이었음을 알아볼 수 있다. 1998-99년에 발굴된 이 유물은 싱가포르 정부와 센토사개발공사(싱가포르의 공기업)에게 3200만 달러에 매각되었다.


배 한 척의 화물 중 남아있는 일부의 가치가 수백억 원에 이른다는 것이 놀라운 일이다. 물론 지금 세상에서 골동품으로서 가치가 커지기도 했겠으나 유물의 품질로 보아 당시 가치도 대단했을 것이 분명하다.
이만한 규모의 상품이 배 한 척에 실려 오갔다는 사실이 당시 교역의 상황에 관해 시사하는 점이 많다. 한 명의 화주(貨主)가 이 상품을 모두 옮긴 것이 아니라 여러 화주의 짐을 모아 실은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운송업자와 무역업자들 사이의 지속적 협력을 위한 제도와 관행이 세워져 있었을 것이다.
일부 도자기 표면의 무늬와 그림은 아랍-페르시아 문명권의 취향에 맞춘 디자인이다. 중국의 자기 제작자들이 서방 시장의 수요를 의식하고 생산에 임한 것이다. 남중국해와 인도양으로 연결되는 거대한 시장의 존재를 보여준다.
육상 실크로드와 함께 열린 해상 실크로드
난파선 잔해의 연구를 통해 선박의 규모와 구조, 재질과 조선 방식에 관한 연구도 진행되어 왔다. 여기서도 벨리퉁 난파선이 말해주는 것이 많다.
약 18미터 길이의 벨리퉁 난파선은 사용된 목재와 일부 유물로 보아 서아시아 지역에서 건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배의 구조와 조선 방식은 남양의 오스트로네시아 전통에 따른 것으로 이후의 서아시아 선박과 다르다. 초기의 인도양 항해는 남양인이 주도했고 다른 지역 사람들의 항해 활동은 이를 발판으로 시작된 사실을 추측할 수 있다.
동아시아와 서아시아 사이에 교통-운송의 필요가 아직 작을 때는 남양인의 선박에 편승했을 것이다. 5세기 초에 구법승 법현(法顯)이 인도에서 중국으로 돌아올 때 (가는 길은 육로였다.) 해로 여행이 무척 험난했던 기록이 있다. 7세기 말 의정(義淨)은 오고 가는 길을 모두 해로로 했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두 사람 모두 중국 배가 아닌 남양 배를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의정의 경우 십여 년의 인도 체류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스리비자야에서 8년간 머문 사실이 눈길을 끈다. 그동안 지필묵을 구하러 광저우(廣州)에 다녀간 일도 있다고 한다. 법현 시절에 비해 해상운송 서비스의 틀이 잡혀 있었다는 인상을 받는다.
당나라 장안(長安)에 서역과 파사(波斯) 문물이 넘쳐나던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내륙 실크로드만이 아니라 해상 실크로드도 이 시기에 열려 있었음을 의정의 기록에서 알아볼 수 있다. 중국과 서방(인도와 페르시아 등) 사이에 교통이 늘어나면서 대륙세력도 배를 만들어 적극적 해상활동을 시작하게 되었다. 벨리퉁 난파선은 그런 상황에서 만들어진 배였다.

경유지에서 목적지로, 교역중심지가 된 남양
남양-인도양 해역에서 8세기 이후의 난파선이 많이 발견되는 것은 그 무렵부터 큰 배가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 이전의 해상운송은 남양인에 의해 이뤄졌는데 이제 대륙인이 직접 나서게 되었다. 대륙인은 남양의 배를 본받아 만들었으나 덩치가 커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쉽게 발견될 만한 크기의 난파선들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8세기 이전 남양인이 주도한 교역에서는 해산물, 임산물 등 남양 자연상품의 비중이 컸다. 8세기 이후에는 동아시아와 서아시아-남아시아 사이의 직접 교역이 늘어나면서 남양은 단순한 경유지가 되었다. 부근의 다른 해역에서도 이 무렵에 해상활동이 늘어난 사실은 9세기 청해진의 등장에서도 알아볼 수 있다.
벨리퉁 난파선의 화물 내용을 보면 동아시아와 서아시아 사이를 왕래한 배였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차츰 항로의 분절(分節) 현상이 나타나 서아시아 배나 중국 배나 남양까지만 다니게 되었다. 12세기 초에 인도 서남부에서 활동한 이집트 상인 빈 이주가 남긴 기록에는 (제 28회에서 소개, https://www.joongang.co.kr/article/25280678) 중국 배의 존재가 보이지 않는다.
이 분절 현상의 원인을 계절풍의 성격으로 흔히 설명한다. 그러나 석연치 않다. 동쪽에서 온 배에게나 서쪽에서 온 배에게나 바람의 시기와 방향은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바람의 성격보다는 교역의 성격에서 원인을 찾아야 할 것 같다.
8세기경부터 적재량 1백 톤급의 큰 배가 다니면서 남양은 동서간 교역의 단순한 경유지가 되었다. 그러나 교역선의 왕래가 잦아지면서 새로운 수출품을 개발하기도 하고 대체상품의 생산에도 나서게 되었다. 후추가 대표적인 사례다. 원래 인도 남해안에서 나던 후추의 중국 수출이 늘어나자 남양 지역의 재배가 시작된 것이다.
남양의 자체 수출품이 늘어나면서 경유지 아닌 목적지로 바뀌게 되었다. 양쪽에서 오는 배들이 남양 상품으로 적재량의 상당 부분을 채우게 되자 나머지를 채우러 반대편까지 나아가기보다 반대편에서 온 배로 가져온 상품을 남양의 항구에서 구해 돌아가게 되었다. 남양의 항구들이 교역중심지(entrepot)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독자들께 드리는 말씀〉
“남양사” 연재를 39회에서 중단합니다. 애초에 담고 싶었던 이야기를 다 담지 못했기 때문에 “종결”이 아닌 “중단”입니다. 필자의 역량 부족으로 인한 중단이라 독자들께 미안합니다.
이 영역의 연구 현황에 대한 판단 착오가 있었습니다. 지금까지 역사학 연구는 서양(유럽과 미국)에 집중되어 있었고 그밖에는 소위 4대문명 발상지와 연결된 지역들의 연구가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 있습니다. 그밖의 지역들은 연구 성과가 아주 적은 상태입니다.
저는 동남아도 그런 “그밖의 지역들” 중 하나로 짐작하고, 최근까지 연구를 종합해 설명해 드리는 것을 이 작업의 목적으로 삼았습니다.
앤서니 리드의 〈통상(通商)시대의 동남아시아〉(2책, 1988, 1993)와 빅터 리버먼의 〈기묘한 평행선: 세계사 속의 동남아시아〉(2책, 2003, 2009)를 읽으며, 그 이후에 나온 연구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새로 나온 책들을 막상 찾아보니 중요한 연구가 뜻밖에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역사 연구가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는 지역이고, “그밖의 지역들”에서 벗어나고 있습니다. 적막강산이리라고 생각했던 영역이 역사학계의 “핫코너”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몇 달 전부터 집필이 힘들어져 매주 쓰던 글을 띄엄띄엄 쓰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쓴 글을 돌아보면 “남양사”의 “서설”을 쓴 셈입니다. 동남아 역사의 이해를 위해 염두에 둘 기본적 특성들을 설명한 것입니다.
중단하는 작업을 언제 재개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많이 읽고 적게 쓰면서 생각을 키워나가면 1년 후에는 풀어낼 이야기의 방향을 새로 잡게 되지 않을까 희망합니다. 한 가지 위안은 이 방면 연구가 급속히 늘어나는 이유가 바로 내가 “남양사”를 중시하는 이유와 통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집필은 중단해도 공부의 의욕은 더욱 솟구칩니다.
꺼내던 이야기를 도중에 중단해서 미안합니다.
김기협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