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년 전 열린 SK하이닉스 임원 워크숍의 연구 주제는 ‘삼성’이었다. 하이닉스가 치열하게 일하는데도 삼성을 제치지 못하는 건 결국 삼성이 더 치열하게 일하기 때문이며, 그러니 삼성을 제치려면 두 배로 일해야 한다는 ‘붉은 여왕 가설’에 임원들이 무릎을 ‘탁’ 쳤단다.
<거울 나라의 앨리스>에서 붉은 여왕은 이렇게 말한다. “여기서는 같은 곳에 있으려면 쉬지 않고 힘껏 달려야 해. 어딘가 다른 데로 가고 싶으면 적어도 그보다 두 배는 빨리 달려야 해.” 이후로 하이닉스 임원들의 조기 출근 결의가 이어졌다. 한 부문에선 임원들이 새벽 5시 반에 출근했다. 삼성 임원들이 오전 6시 반에 출근한다고 하니, 그보다 한 시간은 먼저 출근해야 따라잡을 수 있다는 얘기였다.
하이닉스 임원들이 조기 출근하며 삼성을 따라잡겠다고 할 때, 삼성은 반도체 파운드리(수탁생산) 부문에서 TSMC를 따라잡겠다고 나섰다. 애플 아이폰의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물량을 두고 TSMC와 수주 경쟁을 벌이고 있었고, 당시 첨단 기술인 14㎚(나노미터) 공정에서는 양산 기술을 확보했다. 하지만 TSMC도 가만있지 않았다. 기술·개발(R&D) 인력 400명을 주간 조, 저녁 조, 야간 조로 나누고 8시간씩 3교대로 근무하며 10㎚ 기술을 개발했다. TSMC는 이를 ‘나이트호크 프로젝트’로 불렀다. R&D 사업부가 있는 TSMC 신주 본사 12B 웨이퍼 공장 10층은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았다. 더 빨리 달리지 않는 한 하이닉스는 삼성을, 삼성은 TSMC를 따라잡지 못한다. 적어도 10년 전까지는 그랬다.
하이닉스가 삼성을 제친 건 ‘붉은 여왕 가설’을 거부하면서부터였다. 삼성이 ‘돈이 안 된다’는 윗선의 판단으로 2019년 HBM 조직을 축소했을 때, 하이닉스는 현장 기술진의 의견을 존중해 HBM 개발에 매진했다. 연구-개발-제조 각 부문은 하나의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기 위해 서로 협력했다. ‘신상필벌’하는 삼성과 달리, ‘실패’의 경험을 공유하고자 사내에 실패 경연대회를 열기도 했다. 삼성이 ‘스마트워크’에서 ‘하드워크’로 돌아섰을 때, 하이닉스는 오히려 ‘유연근무’를 도입했다. 요즘 세대를 생각해보면 하드워크나 나이트호크가 지금도 가능할까 하는 의문도 든다.
지난 호 반도체 산업에 대한 표지 이야기 기사를 쓰며 취재한 삼성은 여전히 ‘붉은 여왕의 나라’를 벗어나지 못한 듯했다. ‘K반도체의 위기’는 여기에 있다. 삼성뿐이랴. 많은 조직이 그렇지 아니한가. 내가 속한 조직마저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