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학자인 브라이언 클라스가 쓴 <권력의 심리학>에는 신시내투스라는 인물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기원전 5세기에 로마를 구했다는 인물이다.
당시 로마는 외적의 침입으로 큰 위기를 맞았다. 그래서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 강력한 권한을 행사할 지도자를 추대하기로 했는데, 당시에 은퇴해 있던 장군이자 정치인인 신시내투스라는 인물이 지목되었다. 로마 사람들이 신시내투스를 찾아가서 부탁하자 그는 책임감에 마지못해 자리를 수락했다. 그의 임기는 6개월이었다. 그는 로마군을 이끌고 외적을 무찌른 후 자신의 역할이 끝나자 취임 한 달도 안 되어 사임했다. 그리고 자신이 농사짓던 농장으로 돌아갔다. 20년 후 로마에는 또 다른 위기가 발생했다. 이번에는 로마 내부에서 발생한 위기였다. 돈으로 대중의 지지를 얻은 자가 공화국을 뒤엎고 왕정을 세우려는 음모가 있었던 것이다. 그때도 팔순이 넘은 신시내투스가 21일간만 자리를 맡아서 위기를 해결하고 물러났다고 한다. 리비우스는 <로마사>에서 신시내투스에 대해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있을 때 유일하게 희망을 걸었던 청빈한 사람’이라는 찬사를 보냈다. 미국 오하이오주에 있는 ‘신시내티’시의 도시명은 신시내투스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은 심각한 위기 상황이다. 경제 위기, 기후 위기, 외교 위기, 저출생 위기 등 위기 양상은 나열하기도 어려울 정도이다. 게다가 작년 12월3일 발생한 내란으로 인한 혼란과 갈등도 격화되고 있다. 가뜩이나 어려운 상황에 내란까지 일어나니 시민들은 불안하기 짝이 없다.
이 사태의 원인은 내란을 일으킨 윤석열 대통령에게 있다. 특히 내란 이후에도 정치적 선동을 하면서 법관이 발부한 영장 집행을 거부하고 서울서부지방법원 폭동 사태까지 일어나게 한 것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다.
그러나 제대로 된 정치인이라면 내란 세력의 잘못을 비판하는 것으로 끝나면 안 된다. 국가적 위기에 대처하고 시민들 사이의 혼란과 갈등을 줄여나갈 방안을 제시해야 한다. 그래야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공동체가 안정을 찾을 수 있다. 어차피 탄핵심판은 헌법재판소의 몫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책임을 모면하기 위해 자신의 잘못을 부인하고 거짓말을 해도 소용없을 것이다. 내란죄에 대한 심판도 사법기관의 몫이다. 아직도 수사와 진상규명이 필요한 영역이 있지만, 그것 역시 법과 절차에 따라 진행하면 될 일이다.
따라서 이제 정당과 정치인은 ‘정치’를 해야 한다. 일부 극우적인 정치인들이 내란을 비호하고 있고, 국민의힘이 윤석열 대통령과 관계를 끊지 못하고 ‘헌법재판소 흔들기’ ‘법원 흔들기’를 하고 있는 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이것 역시 정치를 통해 평가받도록 해야 한다.
그것을 위해 필요한 것은 ‘법치주의 수호와 헌정질서 회복’이라는 최소한의 공통분모를 중심으로 정치권 내에서 광범위한 협력 틀을 구축하는 것이다. 앞으로 ‘경쟁’도 예정되어 있겠지만, 지금 할 수 있는 연대와 협력은 필요하다. 그래서 헌정질서를 지키려는 목소리가 헌정질서를 위협하는 목소리를 압도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선 정당과 정파를 넘어 협력 방안을 논의해야 한다. 비상계엄 해제와 탄핵소추에 함께했던 정치인들이 손잡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현 시국을 수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정치적 이해타산은 내려놓아야 한다. 보다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정치를 위해 필요한 헌법 개정과 선거제도 개혁 같은 해묵은 숙제도 논의를 시작할 필요가 있다. 제도개혁에 대한 의지를 확인하는 것이 서로에 대한 신뢰감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정치인들은 불필요한 논란과 갈등을 일으키는 언행을 조심해야 한다. 헌정질서를 지키려고 하는 정치인이라면, 더더욱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 반(反)헌법 세력을 비판할 때를 제외하면, 연대와 협력의 언어가 필요한 때이다.
영웅 같은 정치인을 기대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지금이라도 정치인들이 신시내투스의 미덕을 조금이라도 따라가려고 노력하기를 바란다. 공화국을 위해 맡은 소임을 다하되, 권력을 탐하지 않았던 것이 그의 미덕이다. 지금은 그런 미덕이 절실한 때이다.
권력보다 중요한 것은 국가공동체이다. 국가가 있어야 권력도 있다. 권력을 추구하더라도 국가가 어려울 때는 마음을 비울 수도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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