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과정을 막 시작했을 때다. 느닷없는 의심에 사로잡혔다. “난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 나의 눈에 비친 세상은 원래 수학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조금씩, 세상의 눈에 비친 나를 보게 되었다. 그곳에서 수학은 사소했다. 추상 세계 속의 퍼즐 풀이에 불과해 보였다. 세상엔 고통받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이들을 살리는 일이 절대적으로 중요하지 않을까. 만나는 박사과정생, 교수마다 따져 물어보았다.
누구에게도 답은 없다. 같은 고민에 빠진 학자를 더 많이 발견할 뿐이다. 로랑 슈바르츠 (1915~2002)는 20세기 해석학의 기틀을 만든 수학자이다. 그의 ‘분포’ 이론은 당시 이론물리학계의 많은 역설을 수학적으로 깔끔히 해결해냈다. 유대인 학살, 식민주의 등 격랑의 시대 속에서 그는 언제나 비판의 목소리를 높였다. 자신의 자서전에서 수학자 역시 ‘비정치적인 관전자’에 머무를 수 없음을 증언했다.
수학의 본질을 탐구한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1889~1951)의 태도는 달랐다. 그의 집안은 ‘오스트리아의 카네기 가문’이라 불릴 정도로 부유했다. 유산을 물려받고 나자, 유럽 최고의 부호 중 하나가 되었다. 그럼에도 그는 1차 세계대전에 자원하여 참전했다. 죽음의 공포가 지배하는 참호 속, 그의 명철은 더욱 빛을 발했다. 이때의 연구가 담긴 저서 『논리 철학 논고』는 서구철학을 떠받치는 기반이 되었다. 이후 그는 막대한 재산을 남김없이 기부한다. 절대 자신에게 되돌려 줄 수 없다는 단서조항까지 달았다. 하지만 역사와 사회에 대하여 철저히 침묵하였고, 오직 행동으로만 신념을 증명했다. “멋진 삶이었다.” 치열한 인생을 마치던 그의 유언이다.
혼돈과 슬픔에 빠진 한국 사회의 새해. 다시 의심이 든다. 우리는 말해야 할까, 행동해야 할까, 맡은 일에 매진해야 할까. 어느 쪽이든 같은 소회로 올해를 마칠 수 있기를. “멋진 한 해였다.”
김상현 고등과학원 수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