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한 살 겨울 나는 청담동의 한 학원에서 멘토 교사로 일했다. 방학마다 아이들을 고급 레지던스에서 재우고 먹이며 밤늦게까지 공부시키는 기숙 학원식 프로그램이었다. 초등학생 대상이었다. 대표는 학부모에게 “이미 많이 늦었다”는 말을 자주 하곤 했다.
채린(가명)은 첫날부터 눈에 띄는 아이였다. 청담동 애들이 좀 되바라진 면이 있기는 했지만, 개중에서도 유독 어린애답지 않았다. 사람을 늘 똑바로 쳐다봤고 누구와 마주쳐도 눈을 피하지 않았다. 혼내거나 재촉할 때도 느긋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선생님 말씀 따위 듣지 않아도 인생에 별일 일어나지 않는다는 진실을 채린에게 너무 빨리 들킨 기분이었다.
채린은 모든 과목에서 우수했고 선생들은 그녀를 신뢰하고 예뻐했다. 얼마 안 되어 채린은 반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아이가 되었다. 반 아이들은 남녀 모두 채린의 말에 가장 크게 호응했고 결정을 내릴 때 그녀의 눈치를 살폈고 가까워지기 위해 애썼다.
채린이 같은 반 친구 한 명을 은밀히 괴롭히고 있다는 것을 안 것은 프로그램이 절반쯤 지난 뒤였다. 반 아이들보다 한 살 어린 수현(가명)이었다. 수현은 작고 아주 예뻤고 학년을 높여 수업을 들을 만큼 똘똘했다.
사실 채린 혼자 괴롭혔다기보다는 반 전체가 수현을 따돌리고 있었다. 간식을 먹을 때에도 수현만 빼고 먹었고, 점심시간에도 수현만 두고 나갔으며, 수현이 자리를 비우면 그 자리에 과자 껍데기 같은 것을 올려두었다. 채린은 괴롭히는 일을 직접 하지 않았다. 그 일은 채린과 가까워지고 싶어 하는 아이들의 몫이었다. 채린이 누군가를 괴롭히는 솜씨는 감탄스러웠고 초등학생 아이들은 몇주 만에 자신들만의 질서를 확립했다.
수학 선생은 사려 깊은 사람은 아니었다. 가령 아이들이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조르면, “쪽지 시험에서 모두가 90점을 넘기면 사주겠다” 제안했고 그러면 딱 한 명-꼭 수현이가- 87점 정도를 맞았고, 선생은 “아쉽지만 오늘은 안 되겠구나” 하면서 시험지 관리를 허술하게 했다. 아이들이 “아 또 누구냐?” 짜증내면 채린이 그 틈을 타 시험지를 뒤적거리고선 “왜 있잖아. 맨날 우리 아이스크림 못 먹게 하는 애” 하며 눈짓하는 셈이었다.
점심때마다 홀로 컵라면을 먹는 수현을 보면서 나는 복수심이 일었다.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지만 그나마 생각해낸 것이 으뜸상을 수현에게 주는 것이었다. 가장 우수한 학생은 채린이었지만 가장 점수가 오른 사람은 수현이었으니 그게 정당하기도 했다. 수학 선생과 상의해서 그렇게 해야지, 벼르고 있었다.
수료식 전날 나는 사무실 책상에 엎드려 깜빡 잠이 들었다. 누군가 머리를 후려쳐서 놀라 일어나니 수학 선생이었다. “학생인 줄 알았네” 하며 선생이 그냥 지나쳤다. 나는 선생을 불러 세워 말씀드릴 것이 있는데 으뜸상을 수현에게 주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수학 선생은 당황하더니 으뜸상은 채린이 받기로 이미 결정되었다고 했다. 상의할 여지도 없었다. 수료식 날 단상 앞으로 호명된 아이들이 나와 으뜸상을 받았고 채린도 그중 하나였다.
수료식이 끝나고 부모가 마중 오지 않은 아이들을 데려다주는 차 안에서 나와 수현이 남았다. 수현은 내게 “선생님, 한 달 동안 어떠셨어요?” 물었다. 나는 자다가 수학 선생에게 얻어맞은 게 아무래도 기분 나쁘고 그때 꼭 사과를 받았어야 했다는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나는 수현에게 어른이고 어린아이고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고, 내가 선생님 소리를 들어도 되는 사람인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수현은 잠깐 생각하더니 “그런 생각을 하다니 선생님은 어른이네요” 하고 말했다.
이후 나는 학원에서 일하기를 그만두었다. 지금은 채린도 수현도 성인이 되었을 테고 나도 삼십대 중반이 되었다. 그렇지만 여전히 으뜸상을 주고 싶은 사람에게 주지 못한다.

<하미나 <나를 갈라 나를 꺼내기> 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