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부가 신재정준칙 마련에 착수했다. 기존 기준인 ‘관리재정수지 적자 국내총생산(GDP) 3% 이내’ 규정을 폐기하고 ‘통합재정수지’를 중심으로 한 완화된 규칙을 만드는 것이 골자다. 5년 넘게 재정준칙을 지키지 못한 현실을 반영해 현실적 원칙을 만드는 동시에 재정의 적극적 역할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조치로 해석된다.
12일 서울경제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기획재정부는 최근 재정정책국을 중심으로 현행 재정준칙을 대체할 새로운 기준을 마련하는 실무 작업에 착수했다. 현행 재정준칙은 GDP 대비 관리재정수지 적자를 3% 이내로 제한하도록 규정돼 있다. 관리재정수지는 정부 총수입에서 총지출을 뺀 통합재정수지에서 4대 사회보장성 기금(국민연금·사학연금·산재보험·고용보험기금)을 제외한 수치다. 정부의 실제 재정 상황을 보여주는 순 재정지표로 볼 수 있다. 실제 지난해 관리재정수지 적자는 104조 8000억 원으로 통합재정수지 적자(43조 5000억 원)보다 적자 폭이 더 컸다. GDP와 비교해보면 2025~2029년 관리재정수지 적자 비율은 향후 5년간 평균 4% 초반으로 예상돼 현행 재정준칙을 지키기가 불가능하다.
기재부는 이에 따라 관리재정수지 대신 통합재정수지를 기준으로 새로운 재정준칙을 마련하기로 했다. 국제통화기금(IMF)과 경제협력개발기금(OECD)도 통합재정수지를 재정준칙 지표로 사용하고 있다. 기재부의 한 고위 관계자는 “전 세계 다른 나라들도 경제 상황에 맞게 재정준칙을 완화하고 있다”면서 “국제 통용 기준도 통합재정수지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문재인 정부인 2020년 10월 당시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통합재정수지 적자 비율 3%와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 60%를 기준으로 한 재정준칙을 발표했지만 윤석열 정부 출범 이후 관리재정수지로 기준을 변경했다. 과거처럼 통합재정수지 3%룰을 적용할 경우 국가재정운영계획에 따르더라도 향후 4년간 재정준칙을 지킬 수 있게 된다.
정부가 재정준칙을 완화하기로 결정한 배경에는 한국 경제가 직면한 심각한 저성장 고착화에 대한 위기감이 자리잡고 있다. 올해 한국 경제성장률이 코로나19 팬데믹 당시인 2020년(-0.7%) 이후 가장 낮은 성장률이 예상되는 데다 내년 성장률마저 1%대에 그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면서 기존의 경직된 재정준칙 룰을 고집할 상황이 아니라고 판단한 것이다.
기재부와 한국은행의 전망대로 올해와 내년 성장률이 2년 연속 2%를 밑돌 경우 이는 1953년 관련 통계 집계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IMF 외환위기, 글로벌 금융위기, 코로나19 팬데믹 사태 당시에 성장률이 마이너스와 0%대를 기록한 적은 있었지만 그 다음 해 기저 효과로 크게 반등했는데 이번에는 그 공식마저 깨지는 것을 재정 당국은 크게 우려하고 있다. 미국발 고율 관세 여파와 수출 둔화, 인구구조 충격, 건설 경기 부진 등 복합 악재가 겹치면서 성장 잠재력이 급격히 떨어지고 있기 때문에 재정이 성장을 견인하는 마중물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이 기재부의 판단이다.
기재부 고위 관계자는 “전문가들의 의견을 들어도 지금은 재정 건전성보다 저성장 탈출에 총력을 쏟아야 한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라 우리도 그 의견을 따르려고 한다”고 말했다. 윤석열 정부에서 재정준칙 기준을 통합재정수지를 관리재정수지로 변경해 보다 엄격히 적용한 것이 현재의 저성장 기조와 맞지 않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기재부는 이재명 정부 임기 내에 재정준칙 법제화를 정부 주도로 추진하지 않고 여당인 더불어민주당과 보조를 맞추기로 했다.
하지만 새로운 재정준칙 도입으로 재정건전성이 악화돼 국가신용등급에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 본격화와 고령화에 따른 복지 지출 증가가 불가피한 상황에서 재정준칙 완화는 미래 세대의 부담을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확장 재정 기조를 유지할 경우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도 내년에 50%를 넘어서고 2029년 58%로 크게 치솟게 된다. 여기에 야당인 국민의힘은 재정준칙 법제화를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다. 장동혁 국민의힘 대표는 최근 국회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미래 세대 부담을 줄이기 위해 재정준칙을 도입하자”고 촉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