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월 말 큰 틀을 잡았던 한미 관세 협상이 두 달 넘게 마무리되지 못하고 있다. 3500억 달러에 달하는 대미 투자 패키지의 구체적인 집행 방식을 두고 양측이 의견을 좁히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달 말 경주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회의를 계기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방한할 것으로 알려지면서 이때까지 관세 협상을 최종 타결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5일 정부 등에 따르면 한국과 미국은 여전히 3500억 달러 대미 투자 패키지를 두고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미국은 일본과 합의했던 방식을 요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이 원할 때 원하는 사업을 지정하면 상대방이 45일 내 자금을 조달하는 방식이다. 이 경우 투자액의 사실상 전체가 현금 혹은 지분투자 방식으로 집행될 것으로 보인다.
정부는 이같은 방식은 절대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관세 인하가 절실하고 미국과의 전략적 제휴가 중요하다지만 외환보유고(약 4200억 달러)의 84%에 해당하는 금액의 집행을 미국에 일방적으로 맡겼다가는 외환위기에 직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가 미국에게 무제한 통화스와프를 역제안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정도 안정장치가 없으면 미국이 원하는 방식으로 투자를 집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다.
국민 대다수도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것으로 드러났다. 리얼미터가 에너지경제 의뢰로 1~2일 전국 만 18세 이상 1008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80.1%가 “미국의 3500억 달러 선불·현금 지급 요구는 부당하다”고 답했다. 수용 가능하다는 비중은 12.4%에 불과했다. 잘 모른다고 대답한 응답자는주 전체의 7.5%였다.
부당하다는 입장이 대구·경북(84%)과 광주·전남·전북(84.8%)에서 모두 전국 평균을 웃도는 것으로 조사됐다는 사실도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응답자의 정치적 성향과 무관하게 부정적인 의견이 지배적이라고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조사의 표본오차는 95% 신뢰수준에서 ±3.1%였다. 응답률은 4.1%였다.

문제는 협상이 길어지는 사이 기업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점이다. 웬디 커틀러 아시아소사이어티정책연구소(ASPI) 부회장은 2일(현지시간) 방영된 한미경제연구소(KEI) 대담 프로그램에서 “한국은 여전히 25%의 상호관세에 직면해 있고 이는 경쟁국인 일본·유럽연합(EU)에 비해 불리한 위치”라며 “불과 6개월 전만 해도 자유무역협정(FTA) 체결국인 한국의 관세는 0%였기 때문에 상당히 아이러니하다”고 지적했다.
실제 한국은 7월 말 협상에서 상호관세와 자동차 품목관세를 15%로 낮추기로 했지만 아직 세부 협상이 마무리되지 않아 실제 적용받지는 못하고 있다. 반면 일본과 EU의 수출품목에 적용되는 관세는 15%로 내려간 상황이다. 한국 기업이 일본이나 독일·프랑스 기업에 비해 10%포인트 가까이 높은 관세를 견디며 수출에 나서야 한다는 의미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실제 대미 수출은 8월 이후 2개월 연속 감소세를 보이는 등 관세 피해가 가시화되고 있다. 이에 커틀러 부회장은 “한국 협상팀은 정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며 “수용할 수 있는 한계선을 정해놓고 결정을 내려야 한다”고 조언했다.
정부와 업계에서는 APEC 정상회의를 계기로 교착상태가 해결되지 않겠느냐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을 찾으므로 자연스럽게 이재명 대통령과 만날 기회가 형성될 수밖에 없어서다. 김용범 대통령실 정책실장은 “중요한 계기는 APEC”이라며 “트럼프 대통령이 참석하면 양국 정상간 면담이 있을 것이고 이를 염두에 두고 협상하고 있다”고 말했다. APEC이 관세 협상의 주요 분수령이 될 것이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이 자리에서는 미국 조지아주에서 발생한 한국인 구금 사태에 대한 해법도 안건으로 오를 것으로 전망된다.
다만 일각에서는 APEC 정상회의 당일까지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은 방문하지만 APEC 정상회의에는 참석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오고 있어서다. 이달 29일 방한하되 미중 정상회담 등 일정만 소화하고 한국을 떠난다는 이야기다. APEC 정상회의는 이달 31일 개막해 이틀간 진행되는데 여기에는 마코 루비오 미국 국무부 장관이 대신 참석하는 시나리오다. 한미 정상회담은 예정대로 열릴 것으로 보이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미중 이슈에 집중할 경우 한미 관세 협상은 최종 마무리되기 어려울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