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이를 광주 이모라 불렀다. 이름도 정확한 나이도 모른다. 엄마가 친구라 했으니 비슷한 또래일 것이라 짐작할 뿐이다.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 아버지는 광주교도소에 수감 중이었다. 그때만 해도 광주는 머나멀었다. 아버지 면회를 갈 때마다 엄마는 광주 이모 집에서 자고 먹었다. 이모 집은 넓은 정원이 딸린 멋진 한옥이었다. 전통 한옥은 아니었던지 마루 끝에 유리로 된 미닫이문이 달려 있었다. 이모는 고급스러운 한복을 입고 있었는데 피부가 서양인처럼 새하얗고 볼이 통통했다. 내가 태어나서 본 가장 하얀 사람이었다. 입고 있는 한복처럼 고급스러운 것도 같고, 어딘지 나른한 것도 같았다. 이모가 미닫이문을 열고 마루에 앉아 봄볕을 쬐며 자울자울 졸고 있는 모습을 본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게 그 나른한 첫인상 때문이지 싶다.
이모에게는 아들과 딸이 있었다. 딸의 얼굴은 두어 번 봤다. 내 엄마라고 해도 될 만큼 나이가 많았고, 직장에 다니는 노처녀였다. 나보다 열두 살이 많다는 아들은 한 번도 못 봤다. 대학생인지 뭔지 오빠는 노상 집에 있었는데 밥 먹을 때도 제 방에 틀어박혀 늘 기타만 쳤다. 그닥 잘 치는 솜씨는 아니었다. 오빠 얘기만 나오면 이모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가타부타 어떤 말도 하지는 않았다. 폐보다 훨씬 더 깊은 어딘가에서 나오는 것만 같은 습하고 어두운 한숨만 계속해서 내쉴 뿐이었다.
어느 날인가, 자다가 눈을 떴다. 눈이 오네이. 제복싸니 눈이 쌓였는디 버스가 댕길랑가, 뭐 그런 말들이 오가고 있었다. 다시 까무룩 잠으로 빨려들던 나를 엄마의 한마디가 훅 현실로 끌어당겼다.
“씨도둑질은 못허는 법이네. ○○를 쏙 빼닮았그마. 멀라고 역부러 욕을 묵고 사능가?”
“알아보겄능가… 뽈갱이 새끼로 사는 것보담사 낫겄제.”
“아무리 근다고 첩 새끼로 맹글어서야 쓰겄능가. 쟈도 지 친아부지는 알아야제.”
그때는 무슨 말인지 몰랐다. 기타만 튕기는 오빠의 탄생에 무슨 사연이 있는가 보다 짐작했을 뿐이다. 그래서 방구석에 틀어박혀 기타나 튕기는가, 어쩐지 오빠의 처지가 안타까워 싸그락싸그락 눈 쌓이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몇 방울 눈물을 떨구었다.
나중에야 알았다. 이모의 남편은 엄마의 동료로 산에서 목숨을 잃었다. 죽기 얼마 전 어느 깊은 밤 살짝이 자기 집에 다녀갔다. 그 얼마 뒤 목숨을 잃었다. 위험을 불사하면서라도 죽기 전에 아내의 얼굴을 보고 싶었을 만큼 부부의 의가 좋았단다.
그날 밤의 결과로 오빠가 태어났다. 행여 남편이 다녀간 걸 들킬까 임신한 배를 꽁꽁 싸매고 다니던 무렵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그 소식을 알려준 경찰이 이모에게 흑심을 품었다. 결국 이모는 그이의 첩이 되었고, 세상 사람들은 남편이 죽기도 전에 외간 남자와 정을 통한 년이라며 모진 욕을 퍼부었다. 경찰은 왜 그랬는지 죽은 남편의 아이를 제 아이라 세상에 속였다. 그리고 집 한 칸을 마련해 이모와 자식 둘을 광주로 끌어올렸다. 우리가 광주에 다니던 시절 이모와 그 경찰의 관계가 어땠는지는 모른다.
이른 아침 내가 눈을 뜰 때마다 이모는 노상 나른한 얼굴로 화투점을 치고 있었다. 집 전체의 분위기는 촤악 가라앉아 침만 꼴딱 삼켜도 지진이 일 듯했고, 이모가 착착 내려치는 화투 소리, 옆방에서 들려오는 어설픈 기타 소리에 나는 숨이 막힐 듯했다. 부엌에서는 출근을 앞둔 언니가 조심스럽게 그릇을 달그락거리며 뭔가를 먹고 있었는데, 오직 그 소리만이 아직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 같았다. 이모는 화투점을 치며 무엇을 기다렸을까?
빨갱이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나 빨갱이도 그 자식도 용납하지 않는 세상이라 경찰의 혼외자로 살아야 했던 그 오빠는 끝내 제대로 살지 못했다. 근 삼십년 전 이모가 세상을 떠난 뒤로는 소식조차 알지 못한다. 격동의 시대가 삶을 뿌리째 뒤흔들어 부평초처럼 삶이라는 물결 위를 외롭게 떠다녀야 했던 수많은 사람이 있었다. 더는 그런 슬픈 삶이 탄생하지 않기를, 다시 또 격동하는 시대에 간절한 마음으로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