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대학포럼] 〈249〉추격자 패러다임의 종말과 산업혁신의 조건

2025-12-03

한국 제조업의 위기는 단순한 제조 비용 상승 때문이 아니다. 과거 성공의 원리였던 '추격자 패러다임'의 종말이라는 구조적인 전환점에서 비롯됐다. 이 거대한 변곡점을 극복하기 위해 정부와 기업 모두 생태계 차원의 접근으로 전환해야 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은 2700여척의 리버티선을 평균 2~3주 만에 건조하는 압도적인 제조 능력을 과시했다. 그러나 이후 레이건 행정부 시기 미국의 상선 수주량은 '0'이 되었다. 이것은 제조 경쟁력의 붕괴가 얼마나 빠르게 찾아올 수 있는지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오늘날 한국 제조업 역시 유사한 기로에 서 있다. 이 위기의 원인을 단순히 제조 비용 상승 탓으로 치부하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간과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문제의 본질은 우리 제조업의 위기가 추격자 패러다임의 종말과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김인수 교수의 추격자 모형이 잘 설명하듯, 한국 산업은 선진국이 축적한 기술 지식을 흡수·적용·개선하며 성장해 왔다. 이 패러다임은 후발국이 이미 존재하는 기술을 선진국보다 더 빠른 속도로 따라잡는다는 전제 하에 작동했다. 그러나 이 캐치업 루프(Catch-up Loop)가 끝나는 변곡점에 이르면, 과거의 성공 방식은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이제 기술은 산업의 형성을 앞서가며, 후발국의 추격 속도는 우리의 혁신 속도보다 빨라졌다. 산업이 기술 진보가 나타내는 미래의 청사진으로만 존재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고, 기술과 산업 사이의 꽤나 먼 공간을 스스로 해엄쳐나가야 한다.

우리가 추격자 패러다임을 따르는 동안, 우리에게 산업은 이미 작동 원리와 공급사슬이 규정된 장년기의 모습이었다. 우리는 그 공급사슬과 산업 생태계 구조 안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누군가 했던 것을 모방하는 것이 최선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기술이 산업이 되기까지의 긴 과정을 스스로 상상하고 설계하고 구축해야 한다. 우리 제조업 위기는 추격자 패러다임을 막 벗어난 우리 앞에 펼쳐진 이 생경한 상황과 무관하지 않다. 생산에 필요는 기술을 누군가의 선반 위에서 찾으면 되던 것은 이제 가능하지 않다. 기술은 산업의 조건일 뿐 산업의 성공을 담보해 주지 않는다. 수많은 기술적 대안이 경쟁하고 도태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지배적 디자인이 형성되고서야 비로소 공정 투자가 본격화되고, 긴 캐즘을 지나 공급사슬과 산업 생태계가 갖춰고서야 하나의 산업이 태동하게 된다.

따라서 정부와 기업은 산업의 조건이라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 이를 위해 정부와 기업의 시야는 산업 생태계 차원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정부는 기존의 산업기술정책 프레임워크을 넘어, 생태계 디자인이라는 확장된 영역에서 정책을 확장해야 한다. 과거 기업의 역할로 치부하던 공급망을 구축하고, 규제와 제도를 형성하며, 금융 체계를 정비하는 선제적인 역할이 오히려 미래에는 더욱 중요해진 이유가 그것이다. 정부의 역할은 축소되어서는 안된다.

미래를 보는 기업의 시야 역시 달라져야 한다. 범용 제품 제조, 차별화된 제품과 서비스 제공, 플랫폼 기반 기업화 같은 기존의 전략들은 여전히 유효하겠지만 이제는 산업의 불확실한 구조 위에 생태계와 자신의 독창적 지위를 설계해 내는 동태적 자질이 요구된다.

정부가 생태계 관점에서 정책 디자인을 고민한다면, 기업은 이에 적극 대응하여 생태계 혁신 모델을 탐색해야 한다. 한국 제조업의 위기는 우리가 익숙하던 추격자 패러다임의 종말에서 비롯된 피할 수 없는 숙제이다. 우리는 새로운 산업 형성의 조건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할 시점에 서 있다.

박재민 건국대 교수·ET대학포럼 좌장 jpark@konkuk.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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