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권자’는 두 번의 대통령 탄핵을 거치며 널리 쓰이는 말이 됐다. 하지만 한국의 공적 공간에서 사용되는 다른 어휘들과 마찬가지로 이 말의 정확한 의미를 찾기는 어렵고, 이 모호함이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된다.

주권과 주권자
‘주권’을 가장 흔하게 듣는 때는 선거 시기일 것이다. ‘소중한 주권을 행사해달라’는 투표 독려 문구는 언론이나 국가기관에서도 자주 쓴다. 이때 ‘주권’은 투표에 대한 권리나 정치적 권리를 의미한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헌법 조항과 ‘주권을 행사’하러 투표장에 가는 사람을 동시에 떠올려보면, 뭔가 혼란스럽지 않은가? 헌법에 언급된 ‘주권’은 권리가 아니고, 개인이 행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집회 현장에서는 ‘주권자의 요구다, 윤석열을 탄핵하라’ 또는 ‘우리는 주권자로서 집회에 참여했다’ 같은 발언을 쉽게 들을 수 있었다. 이때 ‘주권자’란 정확히 누구일까? ‘시민주권’이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도 있는데, 그럼 주권자는 시민인가 국민인가? 모든 게 모호해서 말의 정확한 의미를 잡아내기가 쉽지 않다. ‘주권’은 ‘주인의 권리’를, ‘주권자’는 ‘나라의 주인’ 정도를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나는 주권자 국민이므로 나라의 주인으로서 이러저러한 요구를 할 권리가 있다’라는 식의 논리도 찾을 수 있다.
이런 모호함은 다음의 두 가지 혼동에서 비롯한다. 첫째, ‘주권’이 권리(right)와 권력(power)이라는 전혀 다른 개념 사이를 오간다. 둘째, ‘국민’이 개인으로서의 시민(citizen)과 단일한 덩어리로서의 인민(people)을 뒤섞는다.
이런 혼동을 제거하기 위해 헌법 개념을 살펴보자. 대한민국 헌법에 언급된 ‘주권’은 서구 개념의 번역이다. 편의상 영어로 설명하면, sovereign(주권자)의 어원적 의미는 ‘최상위에 있는 자’이고, 신이나 왕을 지시하는 말로 쓰였다. sovereignty(주권)는 최상위에 있는 자가 가진 힘이다. 이것이 정치철학적 개념으로 사용되면서 절대권력을 의미하게 됐고, 현대에는 법 자체를 만들거나 중지시킬 수 있는 권력으로 정의되기도 한다. 주권은 권리가 아니라는 점을 반드시 기억하자. 권리는 개인에게 속한 것이지만, 민주주의 체제의 주권은 인민에 속한다. 주권이 개인이나 몇몇 개인에게 속한다면, 그건 군주정이나 독재 체제다.
시민, 시민들, 인민도 명확히 구별해야 한다. ‘국민’이라는 말은 이 세 가지 개념을 뒤섞으며 온갖 혼란을 일으킨다. 시민은 정치공동체를 구성하는 개인이고, 시민들은 말 그대로 시민 여럿이고, 인민은 단일한 정치적 덩어리다. 어떤 1명이 ‘윤석열 탄핵’을 주장한다면, 이는 시민 개인의 의지다. 100명이 모여 같은 주장을 한다면, 이는 시민들 100명의 의지다. 그럼 모든 시민이 단 1명도 빼놓지 않고 같은 주장을 하는 경우에는 어떤가? 이 역시 시민들 모두의 의지이지, 인민의 의지는 아니다. 선거와 의회를 비롯한 민주주의 절차와 제도를 통해 다양한 의지가 하나로 종합됐을 때, 비로소 인민의 일반 의지라는 것이 탄생한다.
주권은 시민들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민으로부터 나온다. ‘주권자’라고 불릴 수 있는 것은 일반 의지를 형성한 인민밖에 없다. 아무리 많은 시민이 모인다고 해도 주권자는 아니다. ‘우리가 주권자다’라는 시민들의 발화는 인민을 참칭(僭稱)하는 것이다.
이재명 정부의 최근 결정, 특히 장관 인선과 특별사면에 대한 반대 목소리가 존재한다. 재미있는 것은 더불어민주당 정부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자신을 ‘주권자’라 칭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박근혜와 윤석열에 저항하던 시민들이 항상 ‘주권자’를 자임했다는 것과 분명히 대조된다. 이유는 모두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저 말은 인민을 지칭하는 헌법 개념으로 사용된 것이 아니라 민주당을 중심으로 결집한 반(反)박근혜, 반윤석열 진영이 자신을 부르는 이름이었다.
이런 식의 이름 붙이기는 한국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부분이 전체를, 특수가 보편을 자임하는 것은 헤게모니의 핵심 논리이고, 이는 모든 정치적 실천의 필수요소다. 이 논리를 가장 극단적 방식으로 활용하는 것이 서구의 극우 포퓰리즘이다. 극우 정치인이 지지자들 앞에서 ‘우리가 인민이다’라고 선언할 때, 이는 ‘엘리트 계급과 이주민을 배제한 우리야말로 참된 인민이다’를 함축한다. 시민들이 자신을 인민이라 부르는 행위는 논리적 거짓이지만, ‘우리’라는 정치 진영을 구축하는 수행적 발화처럼 작동한다.
물론 한국의 독특성도 있다. 첫째, 부분이 전체를 자임하는 논리를 가장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것은 극우가 아니라 오히려 극우에 맞서는 진영이다. 국민의힘과 그 주변 세력은 전체와 보편을 자임할 역량도 의지도 없다. 둘째, 그 논리가 가진 비합리적·비개념적 본성을 고려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헌법 개념이 사회적으로 명확히 공유된 곳에서는 ‘우리가 인민이다’ 같은 발화가 개념적 오류라는 것을 대부분 알고 있다. 즉 사람들은 그것이 정치적 레토릭임을 분명히 자각하면서 사용한다. 반면 한국에서는 ‘우리가 주권자다’라는 표현이 개념적 오류라는 사실을 대부분 모르거나 무시한다. 그것이 정치적 레토릭임을 자각하면서 쓰는 사람도 별로 없다.
이런 논리의 사용은 유용하지만, 위험하기도 하다. 그것은 강력한 배제의 논리이기 때문이다. ‘우리 주권자가 윤석열 탄핵을 요구한다’라는 식의 발화는 ‘윤석열을 지지하는 그들은 주권자가 아니다’라고 선언하는 것과 같다. 이런 선언은 ‘우리’를 구성하는 동시에 ‘그들’의 결집을 초래하고, 여기서 예측하지 못한 반동이 발생할 수 있다. 또한 그 논리는 외부의 대상뿐 아니라 내부의 작은 목소리도 배제한다. 얼마 전까지 탄핵에 찬성하는 이질적 집단 모두가 ‘주권자’를 자임했고, 이재명 정부는 자신에게 ‘국민주권정부’라는 명칭을 붙였다. 그런데 이 명칭에 언급된 ‘주권자’에는 차별금지법 제정을 요구하는 시민들도 포함되는가? 현 정부와 여당의 모습을 보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래서 질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거리의 시민들이 분노와 자부심을 담아 외쳤던 ‘주권자’란 도대체 누구인가? 그것은 민주주의의 수호자를 부르는 이름인가, 아니면 주류에서 벗어난 작은 목소리를 삭제하는 자의 이름인가? ‘주권자’가 승리하자 이 말의 진정한 기능이 드러나고 있다.
<박이대승 정치철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