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학이 내려온 게 아닙니다

2024-10-30

[우리문화신문=이동식 인문탐험가] 우리나라 전통 악기 중에 거문고갸 있다. 거문고는 이웃나라들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우리나라 고유의 현악기이다. 명주실을 꼬아 만든 여섯 개의 줄을 ‘술대’로 치거나 뜯어 연주하며, 괘(棵, frets)를 짚어 음높이를 조절하고, 왼손으로 농현(弄絃)한다. 흔히 ‘백악지장’(百樂之丈)이라고 하니 곧 모든 악기의 으뜸이란 뜻이다.

우리는 이 악기가 고구려 왕산악이 만들었고 연주를 할 때에 하늘에서 검은 학이 날아와 춤을 추었다고 배웠다. 김부식이 쓴 《삼국사기》의 기록을 근거로 해서였다. ​

“처음에 진(晉)나라 사람이 칠현금을 고구려에 보냈다. 고구려 사람들이 비록 그것이 악기인 줄은 알았으나, 그 음률과 연주법을 알지 못하여 나라 사람들 중에 그 음률을 알아서 연주할 수 있는 자를 구하여 후한 상을 주겠다고 하였다. 이때 둘째 재상인 왕산악(王山岳)이 칠현금의 원형을 그대로 두고 만드는 방법을 약간 고쳐서 이를 다시 만들었다. 동시에 1백여 곡을 지어 그것을 연주하였다. 이때 검은 학이 와서 춤을 추었다고 하여 현학금(玄鶴琴)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훗날 현금이라고만 불렀다.”

... 《삼국사기》 제32권 잡지 제1(三國史記 卷第三十二 雜志 第一)

거문고를 연주하는데 검은 학이 날아와 춤을 추었다는 이 부분의 원문은 " 於時 玄鶴來舞"이니 '현학(玄鶴)'이 와서 춤을 추었다는 것이고 그래서 거문고의 이름을 현학금(玄鶴琴), 줄여서 현금(玄琴)이라고 불렀다고 되어 있다. 이 원문을 보고 예전 어른들은 '현학'을 '검은 학'으로 풀이한 것이다. 이로써 우리들은 이때 검은 학, 곧 까만 학이 날아왔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 가만 학이 있었을까? 좀 이상하지 않은가?

지난번 파리 올림픽 때 124년 전인 1900년에 마침 파리에서 열린 만국람회에 우리나라 고종이 보낸 악기들이 박람회에 참가한 뒤에 프랑스에 기증돼 남아있는데 그 가운데 크기가 큰 거문고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거문고의 오동나무 울림판, 안족과 괘 사이에 학이 한 마리 앉아서 막 날개짓을 하고 있는 문양이 있다. 그런데 그 학은 황금빛을 받은 흰 학이었지, 검은 학이 아니었다.

처음 왕산악이 연주할 때 검은 학이 왔다면 조선시대 임금이 나라 밖에 보내는 거문고의 학도 검은색이어야 하는데 오히려 밝은 황금빛 흰색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검은색, 혹은 꺼먼 색으로 알고 있는 현학(玄鶴)의 '玄'이 '꺼먼' 색이 아니라는 뜻이 된다. 이런 의문이 생겨 현(玄)이란 글자의 뜻을 다시 알아 보았다.

한문을 연구한 학자에 따르면 현(玄)자는 ‘검다’라는 뜻으로 많이 알고 있으나 ‘가물 현’이라고 해야 맞는다고 한다. 천자문에 나오는 천지현황(天地玄黃)은 하늘(우주)은 가물가물하여 멀고 아득하며, 땅은 넓고 넓어 누렇다는 뜻을 표현한 것이기에 '검은'이 아닌 '가물~'로 새겨야 옳다는 주장인 것이다. 그러한 가물가물한 우주공간은 끝 없기 때문에 검게 보인다는 뜻으로 ‘검을 현’이라 하는 뜻도 나온 것 같다.​

현(玄)자는 돼지해머리 두(亠)와 작을요(幺)의 합자로 심오(深奧)하여 아득하고 유원(幽遠)하다는 뜻을 나타내는 회의자(두 개 이상의 ‘상형자-象形字’를 결합하는 방식)며 그것이 전(轉)하여 검은빛ㆍ하늘 등의 뜻으로도 쓰인다. ‘오묘(奧妙)하다. 신묘(神妙)하다. 깊고 고요하다’라는 뜻으로 많이 쓴다.

건물의 출입문이나 건물에 붙이어 따로 달아낸 어귀를 현관(玄關)이라고 쓰는데 이 말은 원래 도교에서 깊고 묘한 이치에 드는 문이라는 뜻이다. 공자와 같이 가장 뛰어난 성인(聖人)을 현성(玄聖)이라 하고, ‘깊고 묘한 도’란 뜻으로 불도(佛道)를 일컬어 현도(玄道)라 한다. 손자(孫子)의 손자를 가물가물한 손자라는 뜻으로 현손(玄孫)이라 부르며, 속 깊이 간직하여 드러내지 않는 덕을 현덕(玄德)이라 한다. 제사 때에 술 대신에 쓰는 맑은 찬물을 현주(玄酒)라 하며, 사람이 죽은 뒤에 그 혼령이 가서 산다고 하는 저승을 현택(玄宅)이라 하여, 검다라는 뜻보다 ‘가물가물하여 아득하다’라는 뜻이 더 많이 담긴 글자이다.

그러기에 현학이 날아왔다고 할 때 그 현은 가물가물한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뜻을 담고 있다고 보는 것이 상식적이지 않을까? 그것을 검은 학이라고 마치 까만 학으로 해석하고 있으니, 우리의 일반적인 인식과 거문고의 창제를 설명한 글하고 괴리가 있다고 보인다.

그런데 가야금을 '가얏고'라고 하는 데서 보듯, '거문고'의 '고'도 오동나무에 줄을 매달아 연주하는 악기의 순수한 우리말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1932년 고구려 땅이었던 중국 지안현[輯安縣]에서 발굴된 고구려의 고분벽화에 거문고의 원형으로 보이는 악기의 그림이 발견됨에 따라 거문고는 진나라 이전의 고구려에 이미 그 원형이 있었다는 설이 유력시되고 있다.

거문고라는 이름도 현학금에서 나온 것이 아닌 ‘고구려금’, 곧 ‘감고(가뭇고)’ 또는 ‘검고(거뭇고)’의 음변(音變)으로 보는 분도 있다. 또 어떤 연구가는 거문고의 '검'이 임금을 뜻하는 우리 고유어이기에 '임금의 고' '임검의 고'에서 '검'이 두드러져 '검의 고' 곧 '거문고'로 불린다고 말한다. 무엇이 맞는가를 확정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학은 검은색의 학이 아니라 가물가물한 하늘에서 내려온, 와을 상징하는 학이라는 뜻으로 풀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것을 玄이라는 글자의 우리말 훈을 적용해 가만 학이 날아왔다고 하는 설명은 잘 납득이 가지 않는다,

우리의 거문고에 비슷한 중국 악기는 琴(금)이라고 하는데, 처음에는 복희(伏羲)씨가 5줄 오현금을 만들고 이어 신농(神農)씨가 7줄을 만들러 후세에 전해졌다고 하기에 고구려에 전래한 악기도 이 칠현금일 것이다.

그런데 《사기(史記) 악서(樂書)》를 보면 ' 진(晉)나라 평공(平公 BC 558-532)이 가장 슬픈 음악을 연주해달라고 강요하자 금의 연주가인 사광(師曠)은 “주군의 덕(德)과 의(義)가 두텁지 않다면 들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지만 평공이 “과인이 좋아하는 것은 음악이니 듣기를 원하노라.”라고 하자 사광이 마지못해 금을 끌어당겨 연주했다. 한번 연주하자 검은 학 28마리가 낭문(郎門)에 모여들었으며 다시 연주하자 학들이 길게 목을 빼어 울고는 날개를 펴고 춤을 추었다고 한다. 이때도 원문은 현학(玄鶴)이 날아왔다고 하는데, 김부식이 거문고의 유래를 설명하면서 알게 모르게 중국의 이런 기록을 무의식중에 가져다 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므로 김부식은 아득한 옛날 거문고의 유래를 기존 중국의 서술을 참조하여 현학이라는 표현을 그대로 썼는데 그것을 한글세대인 우리들이 그 뜻을 안 보고 훈만을 통해 검다고 하며 왈가왈부하는 것이리라. 그리고 이 부분은 한 나라의 지도자가 너무 음악을 좋아하면 나라가 망할 수 있다는 교훈을 주기 위해 아득하고 어두컴컴한 하늘에서부터 학이 내려왔다고 결국은 천지가 뒤집혔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표현한 것인데 그것을 검은색으로만 우리가 해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아무튼 고구려의 거문고는 신라에 전하여져서 옥보고(玉寶高)ㆍ속명득(續命得)ㆍ귀금(貴金)ㆍ안장(安長)ㆍ청장(淸長)ㆍ극상(克相)ㆍ극종(克宗) 등의 계보로 전승되었으며, 극종 이후 옥보고로부터 약 1세기가 지난 뒤부터 세상에 알려져 널리 보급되어 그것이 오늘날까지 음악의 맏이로서 절대적인 위치를 자리하고 있다. 그렇게 우리 민족이 긴 역사 속에서 만들고 개량하고 키워온 것이 거문고란 악기이다.

한층 드높아진 가을 하늘, 그 푸름 속을 들여다보면 끝없는 우주가 보이고 그 하늘을 가로질러 끝없는 시간으로 거문고의 소리가 울려 퍼지면 우리들은 음악 속에서 영원을 함께 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거문고야말로 검은 학이 내려와 춤추어준 악기가 아니라, 가물가물한 저 하늘에서 내려온 최고의 고고한 생물인 학이 축하해주는 으뜸 악기며, 그것을 만들어내고 연주하는 우리들은 우주와 하나가 되는 신령한 음악을 만들고 지키는 사람들임을 새롭게 인식했으면 한다.

멀리 파리에 있는 임금의 거문고 장식을 보며 거문고의 본질에 대해 다시 생각하며 깊고 깊은, 길고 긴 거문고의 소리를 이 가을에 마음놓고 들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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