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침에 라면 하나 끓이는데 걸리는 시간은 5분. 그 사이 국가 빚은 11억5000만원 늘어난다. 점심 식사와 커피 한잔을 즐기는 1시간 동안 139억원이, 퇴근 후 저녁을 먹고 드라마 한 편을 보는 2시간이면 278억원이 더해진다. 잠들고 깨어나면 어제보다 3338억원 더 빚진 나라에서 아침을 맞는다.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4년 뒤인 2029년까지 정부가 공식 전망한 국가채무 증가 추이를 일상에 대입했을 때 맞닥뜨리는 현실들이다.
기획재정부가 발표한 ‘2025~2029년 중기재정운용계획’에 따르면 우리나라 국가채무는 2025년 1302조원에서 2029년 1789조원으로, 4년간 487조원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연평균 122조원씩(8.3%)씩 증가하는 셈이다. 하루 평균으로 따지면 3338억원, 1시간에 139억원, 1분에 2억3000만원, 1초에 약 400만원 쌓인다.
문제는 빚의 절대 규모보다 늘어나는 속도다. 우리나라의 연평균 국가채무 증가율(8.3%)과 국제통화기금(IMF) 국가별 정부 총부채 전망치를 비교해보면 세계 주요 7개국(G7)을 단연 앞선다. 미국은 2029년까지 연평균 5.0%, 일본은 5.5% 증가에 그칠 것으로 예상됐다. 독일(6.1%), 프랑스(5.2%), 영국(4.3%), 이탈리아(2.8%), 캐나다(2.4%)도 모두 한국보다 낮았다. 경제 규모가 비슷한 스페인(2.4%)이나 대만(-4.4%)과 견줘도 한국의 증가율은 압도적이다.

국내총생산(GDP) 대비 국가채무비율 증가 속도도 별반 다르지 않다. 한국의 국가채무비율은 2025년 49.1%에서 2029년 58%로 8.9%포인트 높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같은 기간 프랑스는 9.8%포인트 오르지만, 그 외 독일(7.1%포인트), 미국(4.5%포인트), 영국(2.6%포인트), 이탈리아(0.4%) 등보다 한국의 상승 속도가 더 가파르다. 일본(-0.3%). 캐나다(-6.3%), 스페인(-6.1%), 대만(-6.7%) 우리나라와 달리 국가채무비율이 감소하는 흐름을 보인다.
빚이 빠르게 불면서 이자 부담도 커지고 있다. 올해 우리나라가 지출하는 국채 이자는 약 30조원으로 GDP의 1.2% 수준이다. 절대 규모로는 다른 선진국보다 낮지만 이 역시 증가 속도가 문제다. 지난해까지 국채이자는 연평균 13%씩 불어났다. 정부 전망대로라면 2029년에는 45조원까지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연 평균 증가율은 8~9%로 다소 낮아지지만 여전히 부담이 크다는 평가다. 새 정부의 확장 재정 기조에 따라 추가적인 국채 발행이 예상돼 이자 지출은 더 늘어날 가능성이 높다.
석병훈 이화여대 경제학과 교수는 “다른 선진국 대비 우리나라의 GDP 대비 국가채무 비율이 낮다고 하지만, 국제신용평가사들을 비롯한 해외 기관이 주목하는 건 절대 규모가 아니라 늘어나는 속도”라며 “재정 중독에 빠지지 않도록 긴장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위기 때마다 풀린 돈, 체질이 됐다”…단기 부양에 길든 한국 재정
금융위기·펜데믹 대규모 추경 위기 극복
하지만 경기 회복 뒤에도 씀씀이 줄지 않아
제도적 안전장치 ‘재정준칙’은 사실상 무산
세입은 주는데 의무지출 등 세출은 계속 증가
‘악어의 입’ 계속 벌어져 미래 세대에 큰 부담
IMF “중기 재정 앵커 필요”…재정개혁 급선무

한국의 국가채무가 급격한 속도로 늘어난 배경에는 ‘위기 때마다 돈 풀기’로 요약되는 확장재정이 자리잡고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와 코로나19 펜데믹 같은 충격이 닥칠 때마다 정부는 대규모 추경을 통해 경기를 떠받쳤다. 단기적으로는 고용을 지켜내고 소비를 살리는 효과를 거뒀지만 문제는 그 이후다. 경기가 회복된 뒤에도 재정지출은 위기 이전 수준으로 돌아가지 못했고, 일회성 처방으로 끝나야 할 확장 재정이 상시 지출 체질로 굳어졌다는 지적이 나온다.
첫 경고는 2008년 금융위기였다.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의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은 20%대에 머물렀다. 하지만 위기 극복을 위한 대규모 추경이 이어지면서 불과 2년 사이 30%에 육박했다. 이후 2010년과 2011년 경제성장률이 각각 6.8%, 3.6%를 기록하며 경기가 반등했지만, 재정 지출은 위기 이전 수준으로 줄지 않았다. 관리재정수지 적자 비율도 마이너스를 벗어나지 못했다.
2020년 코로나19 때는 속도가 더 빨랐다. 정부는 1년 동안 네 차례 추경으로 70조 원 가까이 더 쓰면서 연간 지출을 550조 원대 중반까지 끌어올렸다. 하지만 팬데믹이 잦아든 뒤에도 씀씀이는 줄지 않았다. 이듬해에도 또 한 차례 추경이 편성됐고, 나라 살림은 GDP 대비 5%대 적자라는 기록적인 수준까지 악화됐다.
새 정부도 다르지 않다. 정권 출범과 동시에 꺼진 내수 불씨를 살린다는 명분으로 31조8000억원 규모의 추경을 편성해 국회를 통과시켰다. 이전 정부가 마련한 1차 추경(13조 8000억 원)까지 합치면 반년 사이 풀린 재정만 45조원을 넘는다. 여기에 내년도 예산안까지 728조 원으로 편성하면서 올해(673조3000억원)보다 50조원 이상 늘렸다. 증가율(8.1%)만 놓고 보면 2022년 이후 4년 만에 최대다.
문제는 이를 제어할 안전 장치가 사라졌다는 점이다. 관리재정수지 적자를 GDP -3% 이내로 제한하고 국가채무 비율을 60% 이하로 묶겠다는 재정준칙은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고, 정권이 바뀌면서 사실상 무산됐다.
장기 재정 전망은 더욱 어둡다. 국회예산정책처는 앞으로 반세기 동안 세출은 늘고 세입은 줄어드는 ‘악어의 입’ 구조가 계속 벌어질 것이라고 경고한다. 세출은 GDP 대비 지난해 25.5%에서 2072년 33.6%로 늘어나지만, 세입은 같은 기간 24.5%에서 22.0%로 줄어들 것으로 예산정책처는 내다봤다. 특히 연금·복지·국채 이자처럼 줄일 수 없는 의무지출 비중이 갈수록 커지면서, 정부가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재량지출은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는 곧 미래 세대의 부담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국제통화기금(IMF)도 비슷한 우려를 내놨다. IMF 최근 연례협의 보고서에서 “신뢰 가능한 중기적 재정 앵커(목표치)를 마련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지금처럼 고령화 속도가 세계에서 가장 빠른 나라에서 중장기 재정 통제 장치가 사라지면 확장 재정이 장기적 위험으로 번질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실제 기재부도 구조개혁이 없을 경우 GDP 대비 국가채무비율이 현재 49.1%에서 10년 뒤엔 71.5%, 2065년엔 156.3%까지 치솟을 것이란 전망을 내놓은 바 있다.
전직 경제부처 고위 관계자는 “한국 재정은 위기 대응 능력은 입증했지만, 정상화 능력은 보여주지 못했다”며 “단기 부양 이후에도 지출을 줄이지 못해 재정 중독에 빠지는 구조를 개선해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