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꽃에서 배가 달릴지 모르니까 꽃가루 아끼지 말고 팍팍 찍으세요.”
10일 오전 9시, 전남 나주시 봉황면의 한 배 과수원. 새하얀 배꽃이 장관을 이뤘다. 하지만 배꽃에 넋을 놓기도 잠깐, 농장주 정철휴씨(65·죽석리)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무슨 잘못이라도 한 걸까.
“요즘 과수 화상병 방제기간이라 배밭에 막 들어오면 안돼요. 일단 소독하고 보호복부터 입으세요!”
아차, 화상병으로 과수농가들이 신경이 곤두서 있다는 것을 깜빡했다. 신발과 손에 알코올을 뿌리고 전신 보호복으로 갈아입고서야 밭에 입장할 수 있었다. 배 과수원은 1만7038㎡(5153평) 규모로 완만한 경사를 따라 조성돼 있었다. 대부분은 ‘신고’ 배가 식재돼 있었는데 나무마다 색색의 끈이 달려 있었다. 수분수를 접붙였다는 표식이라고 정씨가 귀띔했다. 정씨는 “노랑은 ‘추황’, 파랑은 ‘만황’, 빨강은 ‘창조’ 배를 뜻한다”면서 “수분수 접을 많이 붙였더니 인공수분 횟수를 줄여도 열매가 잘 맺히고 단골 직거래 소비자도 생겨났다”고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본격적인 인공수분 작업에 돌입했다. 며칠 전 언피해를 봤다는 ‘농민신문’ 기사(본지 4월4일자 5면 보도)가 떠올라 배꽃을 유심히 살폈다. 그런데 꽃잎도 생생하고 수술도 풍성했다. 고개를 갸웃하자 정씨는 “꽃잎이 아닌 암술을 살펴야 한다”고 말했다. 건강한 꽃은 암술이 노랗게 솟아 있지만, 언피해를 본 꽃은 가운데가 검게 죽어 암술이 없거나 말려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다시 관찰하니 십중팔구는 상태가 좋지 못했다.
인공수분 작업인부는 모두 4명. ‘선배’ 2명은 ‘타조털 교배기’를 어깨에 메고 앞장섰다. 작은 보조가방 형태인 타조털 교배기는 타조털 붓에 자동으로 꽃가루를 불어 묻혀주는 기계다. 정씨는 “교배기 가격도 점차 올라 10년 전 80만원 수준에서 지금은 100만원이 훌쩍 넘는다”고 말했다. 신참인 기자는 타조털 교배기는 언감생심. 꽃가루가 담긴 대나무통과 알루미늄봉을 받았다. 알루미늄봉은 다 펼쳤을 때 40∼50㎝ 정도 되는데 끝부분에 지름 2㎝쯤 되는 솜털이 달려 있었다. 시중에 보이는 귀이개 솜털과 비슷했다. 대나무통을 목걸이처럼 목에 매고 알루미늄봉 끝 솜털에 꽃가루를 묻힌 후, 암술이 살아 있는 꽃에 ‘톡톡’ 찍었다.
일한 지 2시간쯤 지나자 목덜미가 뻣뻣해졌다. 배 나무 키가 2m 정도 되는데 배꽃은 팔을 올려 뻗으면 닿는 부분에 몰려 있었다. 알루미늄봉을 쥔 오른팔과 어깨가 욱신거렸다.
“인공수분이 손만 까딱이니까 쉬워보이죠? 요령 없으면 다음날 목이 안 돌아가서 앓아눕는 사람 많아요.” 정씨가 웃는 것인지 화를 내는 것인지 애매한 표정으로 말했다.
작업 중간 대나무통에 담긴 꽃가루가 동났고 밭 입구의 창고로 돌아가 석송자(꽃가루 증량제)와 꽃가루를 4대1 비율로 섞어 꽃가루를 제조했다. 종이봉투에 담긴 꽃가루는 20g당 6만원이라고 했다. 정씨는 이 밭 기준 꽃가루를 1㎏ 사용하므로 꽃가루값만 300만원이 드는 셈이다. 지난해엔 20g당 4만원이었으니 1년 새 비용이 100만원이나 껑충 뛴 것이다. 꽃가루 한톨이 금가루처럼 보였다.
오후 4시, 날이 흐려지자 정씨가 작업을 마무리하자고 손짓했다. 정씨 부인이 저온창고에서 지난해산 배 세개를 꺼내왔다. ‘만황’ ‘추황’ ‘조이스킨’이라는데 단맛이 강해 피로가 싹 가셨다. 올 한해 이상기상은 저만치 물러가고 시원하고 달달한 배가 주렁주렁 달리길 소망해본다.
나주=정성환 기자 sss@nongmi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