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요한 회의가 있을 땐 팀원들과 한강 공원으로 나갑니다.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잘 떠오르더라고요.”
서울 성수동의 한 스타트업 대표는 최근 과감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사무실 한쪽에 있던 회의실을 없애고 ‘움직이는 오피스’로 불리는 목적기반차량(PBV)을 들여온 겁니다. 회의와 업무뿐만 아니라 휴식까지 모두 차 안에서 해결하는 시대가 열리고 있습니다.
자동차 ‘움직이는 공간’ 되다
자동차에 대한 인식이 바뀌고 있습니다. 단순한 이동 수단을 넘어 생활과 일상이 녹아드는 라이프스타일 공간으로 진화하고 있는 것이죠. 이런 흐름의 중심에는 바로 PBV가 있습니다.
PBV는 말 그대로 특정 목적에 맞게 처음부터 설계된 차량입니다. 기존 차량을 개조하는 게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왜 이 차가 존재해야 하는가’에 답을 갖고 태어나는 셈이죠. 예를 들어 휠체어 탑승용 택시, 이동형 카페, 캠핑카 등 다양합니다.
시장조사업체 오리온마켓리서치에 따르면 글로벌 PBV 시장은 2030년까지 연평균 6.1% 성장할 전망입니다. 현대자동차그룹은 글로벌 PBV 시장이 올해 130만 대에서 2030년 2000만 대 수준으로 확장될 것이라고 추산한 바 있습니다. 그만큼 시장 성장성이 충분하다는 의미입니다.
이에 따라 완성차 업체들의 움직임도 빨라지고 있습니다. 미국 제너럴모터스(GM)은 상용차 브랜드 ‘브라이트드롭(BrightDrop)’을 통해 아마존 등과 배송 차량을 상용화하는 등 PBV 시장에 뛰어들었습니다. 포드는 다양한 차체 옵션을 제공하는 ‘E-트랜짓(Transit)’ 모델로 PBV 시장을 공략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PBV는 단순한 ‘특수차’가 아닌 자동차 산업 전체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흐름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국내도 본격 시동…기아, PV5로 출격
국내에서는 기아가 가장 발 빠르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기아의 첫 PBV 모델인 PV5는 8월부터 국내 고객 인도를 시작했습니다. 향후 PV7, PV9, 초소형 PV1까지 라인업을 넓힐 계획입니다.
올해 1월에는 우버와 업무협약(MOU)을 체결해 우버 드라이버들이 PV5를 업무용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협력 중입니다. PBV가 실제 서비스 시장으로 들어오고 있다는 의미죠.
기아는 최근 PV5 택시 모델에 특화한 ‘올인원 디스플레이2’를 공개하기도 했습니다. PV5는 네비게이션과 미터기 등 택시 주요 기능을 하나의 화면으로 통합해 운행 편의성을 높였을 뿐 아니라 넓은 실내 공간과 360㎞에 육박하는 1회 충전 주행 가능거리 등을 갖추면서 택시 시장의 전동화 전환을 앞당길 것으로 기대됩니다.
올 인원 디스플레이2는 카카오T 기반의 택시 기사용 애플리케이션과 내비게이션(카카오 내비), 미터기 등 택시 영업에 필수 기능을 12.9인치 중앙 디스플레이에서 한 번에 이용하는 택시 전용 옵션인데요. 택시 기사는 운전대 옆 버튼을 눌러 택시 앱상 승객 호출을 수락할 수 있고 하이패스 통행 요금을 승차 요금에 자동 합산해 결제를 간소화했습니다.
PV5는 승하차 높이는 399㎜로 낮은 데다 2열 슬라이딩 도어의 개방폭은 755㎜로 넓어 승객들이 차량에 타고 내릴 때 편리한 장점이 있습니다. 준중형급 외관과 달리 2999㎜의 축간 거리를 기반으로 대형 차량에 버금가는 실내 공간을 자랑하죠. PV5는 71.2㎾h 배터리를 탑재해 한 번 충전으로 358㎞를 주행할 수 있습니다.

차량 제조·운영 전 과정서 혁신
국내에서 PBV 시대를 선도할 준비를 해온 기업도 있습니다. 바로 특장차 전문 기업 케이씨모터스(KC Motors)**입니다.
케이씨모터스는 2006년 기아 카니발 하이리무진을 시작으로 프리미엄 리무진 브랜드 노블클라쎄(Noble Klasse)를 통해 시장에서 입지를 다졌습니다. 특히 벤츠 스프린터 기반의 ‘L13’ 모델은 ‘도로 위의 프라이빗 제트기’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최근엔 자율주행 셔틀 로이(ROii)의 설계에도 참여하면서 기술 역량을 자율주행·미래 모빌리티로 확장 중입니다. 단순 개조가 아닌 PBV를 처음부터 설계·제작하는 인프라와 기술력을 갖추고 있다는 게 이 회사의 강점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케이씨모터스가 최근 차봇모빌리티와 손을 잡았다는 겁니다. 이들은 단순히 차량을 파는 게 아니라, PBV를 서비스 형태로 경험하게 하는 디지털 기반 유통 시스템을 만들고 있습니다.
차봇모빌리티는 ‘디지털 컨시어지 서비스’를 통해 고객이 온라인에서 차량 옵션을 비교하고 보험·금융·시공·관리까지 원스톱으로 해결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양사는 고객 데이터를 기반으로 지역별 수요 분석, 맞춤형 모델 기획, 사후관리까지 연결되는 PBV 선순환 구조도 구축하고 있습니다. 차량 제조에서 운영까지 모빌리티 전 과정의 혁신이 이뤄지는 셈입니다.
PBV는 단순히 새 차를 만드는 게 아닙니다. 이동의 개념 자체를 바꾸는 산업 혁신입니다. 차량이 ‘목적’에 따라 맞춰지고 ‘삶의 방식’에 따라 진화합니다. 정부와 지자체도 이미 PBV를 공공 영역에 도입 중입니다. 휠체어 탑승용 택시, 이동형 병원, 라스트마일 물류 등 사회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이제 자동차는 단순히 ‘어디로 갈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담는 공간이 됩니다. 그 공간을 누가 어떻게 설계할지, 그리고 어떤 경험을 제공할지가 중요한 시대가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