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에 스러진 22세 청년 기범씨의 꿈
HD현대미포 조선소에서 잠수 중 숨져
‘2인1조’ 원칙 없었다···“무리한 작업”
해군특수전전단(UDT) 군인을 꿈꾸던 22세 청년 김기범씨의 시간은 지난해 12월30일, 울산 동구 HD현대미포 조선소에서 멈췄다. 한겨울 바다에서 홀로 잠수 작업을 하다 의식을 잃은 김씨는 입수 약 4시간30분 만에 숨이 멎은 채 발견됐다. 지난 15일 오후, 울산 앞바다를 바라보는 장례식장 빈소에 놓인 영정사진 속에서 김씨는 푸른 풀밭을 배경으로 웃고 있었다. 그 앞에는 샌드위치와 콜라 한 캔이 놓여있었다.
“그 나이 애들이 그렇듯이 샌드위치, 피자, 햄버거 이런 걸 좋아했어요. 매일 아침, 점심, 저녁으로 올려주고 있어요.” 어머니 윤선희씨가 말했다.
김씨의 유족은 보름 넘게 그의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있다. 김씨가 소속됐던 하청업체 대한마린산업 대표는 사고 후 잠적했다. 수사가 시작되고서야 뒤늦게 두어번 조사를 나왔고, 빈소를 찾아 짧게 얼굴만 비추고 간 것은 지난 15일 밤의 일이다. 원청인 현대미포는 ‘원청의 책임은 없다’는 입장만 유지하고 있다. 누구에게도 제대로 된 설명과 사과를 듣지 못한 채 유족은 기약 없이 빈소를 지킨다.
김씨는 공고를 졸업하고 평소 꿈꿔 온 UDT의 꿈을 이루기 위해 잠수 일을 시작했다. 학창시절에는 학력최우수상과 공로상 등을 휩쓸었던 그는 UDT라는 꿈이 생긴 뒤로는 프리다이빙과 인명구조 자격증도 땄다.
“어떤 일이 있어도 매일 운동하며 체력단력을 했어요. 책임감도 강하고, 술·담배도 전혀 안 하고,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윤씨가 말했다. “엄마한테는 사근사근 딸래미같이 말하는 아들이었어요. 자격증도 시험 비용을 부모한테 말 안 하고 혼자 알바해서 마련해서 땄더라고요.”
꿈을 향한 길을 착실히 밟아나가던 김씨는 대한마린산업 입사 3개월 만에 사고를 당했다. 고용노동부 등 설명을 종합하면, 김씨는 지난해 12월30일 오전 10시14분 현대미포 조선소 안벽에서 선박 아래 촬영을 위해 동료와 1차 잠수를 했다. 시야가 좋지 않아 작업이 어려워지자 김씨는 오전 11시20분쯤 뭍으로 나왔다. 그는 8분만 휴식을 취한 뒤 홀로 5㎏ 산소통을 멘 채 2차 스쿠버 잠수를 했다가 의식을 잃었다.
현장 관계자들은 오후 1시쯤에야 김씨가 올라오지 않았다는 걸 알고 사내 신고를 했다. 소방이 투입됐지만 물 속에 뻘이 많아 시야가 확보되지 못해 수중 드론 수색을 해야 했다. 김씨는 오후 4시에야 숨진 채 건져올려졌다.
사고 이후 총체적인 안전보건관리 부실이 드러났다. 산업안전보건기준에 관한 규칙은 스쿠버 잠수작업 시 반드시 ‘2인 1조’를 지키고 감시인까지 둬야 한다고 정한다. 별도의 비상용 기체통과 수중 시야확보장비, 압력계 등도 제공해야 한다. 하지만 김씨는 홀로 잠수했고, 원청 안전관리직원도 오전 11시30분쯤 현장에서 철수했다.
대한마린산업은 평소 잠수 장비조차 제대로 지급하지 않아서 김씨와 동료들은 사비로 장비를 사야 했다. 지난해 성탄절 즈음, 김씨는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는 누나를 만나러 어머니와 함께 서울을 찾은 김에 잠수 장갑을 구입했다. 김씨의 동료들은 평소 회사로부터 안전교육도 전혀 받지 못했다고 유족에게 말했다.
“기범이가 장비 정기검사가 제대로 안 이뤄진다고 불만을 말하기도 했는데 안 받아들여졌대요. 그래서 직원들은 ‘퇴사가 답’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녔다네요.” 아버지 김성환씨가 말했다. 대한마린산업은 7년째 현대미포로부터 잠수 작업을 도급받아 왔다.
사고만큼 유족의 마음을 후벼판 건 업체들의 대응이었다. 대한마린산업 대표는 사고 후 한동안 잠적했다. 동료들은 해경 조사를 앞두고 대표가 “기범이 잘못으로 몰고 가야 산다”거나 “우리 과실이 없게 ‘잠수 교육이 돼 있다’라고 말하라”고 했다고 유족에게 전했다. 수사기관의 압박에 뒤늦게 조사에 나온 대표는 그 뒤로도 유족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그는 지난 15일 밤 잠깐 빈소를 찾았지만 ‘죄송하다’는 말만 하고 10여분 만에 돌아갔다.
원청인 현대미포 측은 유족에게 “직접적인 책임은 없지만, 인도적 차원에서 지원을 하겠다”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산업안전보건법과 중대재해처벌법상 원청은 자신의 사업장에서 일하는 하청업체 노동자의 안전보건관리 책임을 져야한다. 해경과 노동부는 현대미포 대표와 법인, 대한마린산업 대표 등을 모두 입건해 수사하고 있다.
유족은 원청과 하청이 책임을 회피하려고만 한다고 보고 있다. “초반에 장례를 돕겠다며 현대미포 직원들 몇 명이 왔는데 조문객들에게 어디서 왔냐고 캐묻고, 유족과 조문객이 이야기하면 뒤에 앉아서 듣고 있더라고요. 우리가 노이로제에 걸릴 정도로 감시를 해서 나가라고 했어요.” 아버지 김씨가 말했다.
현대미포 측은 경향신문에 “조문객들의 소속을 물은 건 잠적한 대한마린산업 대표의 행방을 수소문하기 위한 행동이었다”며 “현대미포는 사고 수습을 위해 유가족과 보다 긴밀히 협의해 나갈 계획이며, 사고 수습 과정에서 대한마린산업의 비협조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관계기관과 함께 적법하게 조치될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했다. 경향신문은 대한마린산업 대표의 입장을 듣기 위해 업체에 연락했지만 이 업체 관계자는 “현재 대표가 연락이 닿지 않는다”고 했다.
“명절에 술 한잔 따라줘야 하는데···”
지난해 조선소에서는 유독 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민주노총 금속노조는 지난해 28명이 조선소에서 산재로 사망했다고 집계했다. 김씨 같은 잠수부 사망자는 3명인데 모두 하청업체 소속 20~30대 청년이었다.
조선소 노동 전문가들은 ‘위험의 외주화’의 부작용이 점점 심해진 탓이라고 지적한다. 조선업 호황에도 생산 대부분을 담당하는 하청노동자들의 처우는 심하게 열악하다. 숙련공들이 떠나면서 작업이 밀리는데 조선소는 물량을 쳐내기에만 급급한 행태를 보이고 있다.
지난해 일어난 잠수 사망사고 3건 모두 안벽에 배 2척을 이중 계류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잠수 작업은 배 1척을 대상으로 해야 거리 등이 확보돼 안전한데, 무리한 생산일정으로 이중 계류 상태에서 작업하다 보면 사고가 나기 쉽다. 이김춘택 금속노조 경남지부 거제통영고성조선하청지회 사무장은 “일은 많은데 (처우 악화로) 노동자가 모자란 상황”이라며 “물량팀(재하도급 비정규직)이나 이주노동자로 채우다 보니 공정 지연이 계속 생겨 이중 계류를 하게 되는 것”이라고 했다.
유족은 제대로 된 사과와 문제해결을 촉구하며 김씨의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있다. 김씨의 부모는 모두 지병이 있어 병원을 정기적으로 다녀야 하지만, 아들을 편히 보낼 수 있게 되기 전까지는 빈소를 지키려 한다. 이들은 변호사와 함께 직접 법률대응을 하고, 주변에 물으면서 사고 원인을 밝혀내고 있다.
“이제는 울 것도 다 울었다는 심정이고 그냥 멍하니 있습니다. 기범이도 잘 보내주고, 나중에 명절에는 술이라도 한잔 따라주고 해야 하는데 기약이 없으니 답답합니다.” 아버지 김씨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