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에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가 열리는 것은 1991년 서울, 2005년 부산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다. APEC 출범 초기였던 과거 회의에서는 다자무역체제와 무역 자유화에 대한 의지를 확인하는 데 주력했다면 이번 경주 정상회의에서는 복잡해진 국제 정세를 반영해 구체적인 협력 분야를 제시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미중을 중심으로 한 신냉전 구도가 굳어지는 상황에서 갈등 완화와 협력 증진에 대한 의지가 포함될 가능성이 크다. 또 다자무역체제라는 큰 틀에서 세부적으로 인공지능(AI), 인구문제, 지속 가능한 성장 등 분야가 선정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번 APEC 정상회의에서 우리 정부는 AI와 인구구조 변화 대응을 핵심 의제로 제시했다. 전통적인 무역·투자·공급망 중심 논의에 ‘미래 사회구조’ 의제를 결합한 시도로 한국이 의장국으로서 새 협력틀을 제안한 것이다.
이재명 대통령이 지난달 유엔안전보장이사회를 주재한 자리에서 ‘APEC AI 이니셔티브’ 채택을 추진 중이라고 밝힌 만큼 회원국들의 밀도 있는 논의가 예상된다. 외교부 관계자는 최근 브리핑을 통해 “한국이 의장국으로서 AI와 인구문제 논의를 주도하는데 이는 APEC이 기존에 다뤄오던 주제가 아니라 올해 처음 한국이 제시한 새 의제”라며 “회원국이 얼마나 공감대를 형성하고 합의에 이르는지가 이번 회의의 핵심”이라고 설명했다. 다른 정부 관계자는 “AI는 단순한 기술 문제가 아니라 경제구조 전환의 중심”이라며 “의장국으로서 ‘책임 있는 AI 활용 원칙’을 도출하고 회원국 간 연구 인프라·인력 교류를 확대할 것”이라고 밝혔다. 앞서 유엔에서 이 대통령은 ‘AI 이니셔티브’에 대해 △AI 거버넌스 국제표준 논의 △디지털 역량 격차 해소 △공공분야 AI 활용 확대 등을 포함할 것임을 예고한 바 있다.
한국은 저출산·고령화 문제도 의제로 내세워 단순한 사회 위기가 아닌 새로운 성장 전략의 기회로 접근할 계획이다. 외교부 관계자는 “인구문제는 한국뿐 아니라 APEC 다수 회원국이 겪는 공통 과제”라며 “노동력 감소와 복지 부담 증가가 경제 전반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말했다. 정상회의에서는 여성·고령층의 경제활동 확대를 비롯해 돌봄·헬스케어 산업 육성 및 AI 활용 생산성 제고 방안 등이 논의될 예정이다.
외교부는 이번 회의의 성패가 ‘합의 문구의 수위’에 달렸다고 보고 있다. 즉 AI와 인구문제라는 ‘새 의제’가 기존 경제협력 틀 속에서 얼마나 현실적 합의로 자리 잡을 수 있을지가 관건인 셈이다. 외교부 관계자는 “APEC은 합의된 문장으로 결과를 내는 협의체이기 때문에 단어 하나, 표현 하나가 중요하다”며 “한국이 제시한 새 의제가 ‘경주 선언’에 어떤 형태로 반영되는지가 이번 회의의 가장 큰 관심사”라고 평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