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족이라고 무조건 처벌 않지만, 죄 있으면 가려 처벌

2025-12-04

조선과 달랐던 국정 농단 처벌

“삼족(三族)을 멸하라!” 한 사람의 죄가 그 목숨 하나로 갚을 수 없을 만큼 클 때, 친족을 함께 죽이는 극형을 말한다. 후손이 끊어질 테니, 말 그대로 멸문지화(滅門之禍)를 입게 된다. 진시황이 처음 시행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한나라 때 토사구팽(兎死狗烹)이란 말을 낳은 한신이 고조에게 의심받아 ‘팽’ 당할 때 삼족이 함께 처형당한 사례가 있다. 이후 중국에서는 반역을 모의하는 등의 중범죄자에 대해 삼족을 멸하는 일이 잊을 만하면 반복되었고, 심지어는 연좌의 범위를 더 넓혀 구족(九族)을 멸한다는 말까지 나왔다. 당연히 목숨을 잃는 사람도 많아서 당나라 때는 ‘멸삼족’으로 300여 집이 처형된 기록이 있으며, 명나라 초 주원장의 부하 난옥(藍玉)이 역모 혐의로 처형될 때는 족인(族人) 1만5000명이 한꺼번에 희생당했다. 이쯤 되면 죄와 벌의 비례가 크게 무너지고, 재발 방지의 정도를 넘어 권력자의 감정이 실렸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땠을까?

이자겸 여섯 아들은 공범 판단 처형

이인임 미워했던 형은 처벌 면해

뜻 같으면 모계·처가까지 ‘족당’ 결성

정치적으로 함께 떴다 함께 몰락

음서제·상속도 친인척 차별 없어

아들·사위 똑같이 출세하고 상속

연좌제, 중국처럼 가혹하지 않아

우리나라 역사에는 삼족을 멸한 적이 없고, 그런 규정도 없었다. 다만 연좌제가 아예 없지는 않아서 대역죄 등에 대해서는 일가친척을 함께 처벌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조선시대 단종 복위를 시도했다가 역적으로 몰려 죽은 성삼문이다. 성삼문 본인은 능지처사, 아들들은 모두 교수형, 어머니와 부인·딸·손자·손녀·형제·자매는 노비로 만들었고 재산은 모두 몰수했다. 처벌은 가혹했지만 권력자의 감정이 실리지는 않았고 형법과 정확하게 일치했다. 형법은 다음과 같았다. “모반과 대역죄를 범한 자는 우두머리인지 종범인지를 따지지 않고 모두 능지처사한다. 그 아버지와 16세가 넘은 아들은 교수형에 처한다. 15세 이하 아들과 할아버지·어머니·부인·딸·며느리·손자·형제·자매는 노비로 삼고 재산은 몰수해서 관청에 들인다. 백부와 숙부, 그리고 형제의 아들은 유배 보낸다.” 즉, 아버지와 본인, 아들 3대는 사형에 처하고 나머지 가족들은 유배하되, 처벌 범위는 부계(父系) 친족에 한정되었다. 사위는 아마 다른 집 아들이란 생각이 앞서서였는지 포함되지 않았다. 만일 이런 일이 고려에서 일어났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고려에도 물론 삼족을 멸하는 따위의 법은 없었지만 중대 범죄에서 함께 처벌되는 친족의 범위가 조선과 달랐다.

고려가 망하기 4년 전인 1388년, 우왕이 최영과 이성계를 불러 밀령을 내렸다. 우왕 즉위 후 14년 동안이나 권력을 휘두르며 국정을 농단해온 이인임·임견미·염흥방을 제거하라는 명령이었다. 최영과 이성계가 명을 받들어 이·임·염 일당을 잡아들이고 그중 고위 관료 70여 명을 처벌했는데, 그 양상이 조선과 달랐다. 우선, 우두머리 이인임은 사형이 마땅했으나 평소 가까이 지내던 최영이 비호하는 바람에 유배에 그쳤다(이 일로 최영의 사사로움이 세간의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임견미와 염흥방, 그리고 이들과 동급으로 지목된 반복해와 도길부는 사형에 처해졌다. 이들 말고 사형당한 사람은 이인임의 조카사위 신정, 종손(從孫) 이존성, 임견미의 동생 임제미, 아들 임치, 사위 김영진, 조카 이미생·임맹양, 조카사위 신권, 염흥방의 형제 염국보·염정수, 매부 홍징·임헌·이송, 사위 윤전·최서, 조카 염치중·홍상연, 반복해의 아버지 반익순, 형 반덕해, 매부 박인귀·이희번·정각·김함, 도길부의 사위 신봉생 등이었다. 조선과 달리 사위나 매부, 조카사위 등 혼인으로 엮인 사람들, 즉 인척이 많고, 반대로 백부·숙부나 손자 등 부계 친족의 핵심이 빠진 점이 눈길을 끈다. 또 같은 때에 이인임의 동생 이인민, 아들 이환, 사위 권집경, 조카사위 하륜과 도길부의 아들 도유는 유배에 그쳤고, 이인임의 다른 아들 이민과 사위 강서는 무사했으며, 이인임의 다른 형제들 쪽에도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 조선처럼 ‘혈연 거리’에 따라 기계적으로 연좌시킨 것이 아니라 친인척 중에서도 직접 연루된 사람만을 가려 처벌했고, 이점에서는 인간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사촌 이자의 반란 때 이자겸 무사

고려시대에 반역죄로 처벌을 당해도 그 죄가 형제나 아들 모두에게 미치지 않았던 사실은 고려 중기 이자겸에게서도 확인된다. 이자겸의 난에 앞서 사촌인 이자의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처형된 일이 있었다. 그때 17명이 죽임을 당하고 50여 명이 유배되었는데, 이자의의 친족 가운데는 두 아들과 사촌·당숙이 처벌받고 다른 형제들과 3촌~5촌 사이의 친족들에게는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 그 덕에 이자겸은 고위 관직으로 승승장구하면서 둘째 딸을 예종의 왕비로, 셋째 딸과 넷째 딸을 인종의 왕비로 들여 2대 국왕에 걸친 외척으로서 최고 권력자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권력에 스스로 도취되어 외손자이자 사위인 인종과 대결하다 결국 반역자로 몰려 유배되고 말았다. 이때 연루되어 처벌된 사람은 이자겸의 처와 여섯 아들을 비롯해서 동생·사위·생질·당형제·외사촌 형제 각 한 명씩이었다.

이자겸의 아들들이 모두 처형된 것은 단순한 연좌가 아니라, 평소 아버지와 함께 권세를 누리던 반란의 공범이라서였다. 반면, 고려 말에 이인임의 형 이인복은 평소 “나라를 망치고 집안을 망칠 자는 필시 이 아우일 것이다”라며 미워했다고 하니, 연좌되지 않은 것이 오히려 당연했다. 부자·형제같이 가까운 피붙이라도 정치적 입장이 반드시 같지는 않았고, 그 다름을 인정받았던 것이다. 그래서 고려에는 친족으로서 같은 정치세력을 구성하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 따로 있었는데, ‘족당(族黨)’이 바로 그것이다. (노명호, ‘고려후기의 족당세력’) 족당의 뿌리가 되는 친족의 범위도 조선과 달랐다. 지금 우리에게 익숙한 부계 친족이 아니라 ‘나’를 중심으로 해서 아버지 쪽으로 내려오는 내족(內族)과 어머니 쪽으로 내려오는 외족(外族), 혼인을 통해 만들어진 인족(姻族)이 모두 나의 친족이 되었다. 이 안에서는 대칭적인 관계가 형성되었는데, 예를 들어 백부와 외삼촌, 고모와 이모, 백부의 친손자와 이모의 외손녀가 각각 ‘나’와 거리가 같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이 거미줄 같은 관계망 속에서 4촌까지를 친족이라고 여겼다. (이종서, 『21세기에 다시 보는 고려시대의 역사』)

장인·처남과 정치 공동체 많아

고려의 독특한 친족 관계는 또 하나의 독특한 제도인 음서에도 반영되었다. 음서란 5품 이상 관리의 후손에게 관직을 그냥 주는, 오늘날 부모의 권력이나 재력을 이용해서 자녀가 특혜를 누리는 것을 ‘현대판 음서’라고 비유하는, 바로 그 제도이다. 신분제가 없어진 뒤로는 불법 부당한 일이지만, 고려 같이 귀족제의 요소가 있던 시절에 관직의 대물림은 오히려 당연시되었다. 그런데 고위 관리가 관직을 줄 수 있는 후손은 아들·사위·손자·외손자·생(甥·여자 형제의 아들)·질(姪·남자 형제의 아들) 등으로, 가족 안에서 아들과 딸을 차별하지 않는 것을 기본 원리로 하는 범위였다. 나에게 음서의 혜택을 베풀어줄 수 있는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 아버지와 장인, 백·숙부와 외삼촌은 각각 동일하게 인식되었다. 고려에서는 부모의 재산을 아들·딸이 똑같이 상속했으니 아버지와 장인의 은혜가 같을 수밖에 없었다. 상례(喪禮)에서도 백·숙부와 외삼촌, 고모와 이모가 세상을 떠났을 때 같은 상복을 입었다. 평소 관계가 이러했으므로 그들 외족과 인족 중에 누군가가 권력자가 되면 족당의 구성원이 되어 온갖 이익을 누릴 수 있었다. 그래서 인척인 장인·처남과 정치적으로 같은 배를 타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이고, 반대로 몰락할 때는 같이 몰락했다. 이인임의 사례에서 수많은 사위와 매부가 함께 처벌받은 것이 그 때문이었다.

친족의 범위가 내족·외족·인족까지로 넓어지다 보니 같은 친족이라고 해도 정치적 연대가 느슨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중범죄자의 아들이나 형제라고 해서 무작정 연좌시켜 처벌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고려에서 삼족을 멸하면 안 되었던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다만, 친족이라면 족당이 되어 정치적 이익을 나눌 가능성이 높았으므로 친족의 중대 범죄에 연루되어 처벌받는 사람이 많았을 뿐이다. 고려의 친족은 조선과 근본적으로 달랐다. ‘나’를 기준으로 아버지 쪽과 어머니 쪽을 동등하게 인식하는 것은 부모의 입장에서 아들과 딸을 차별하지 않는 것과 통한다. 고려는 조선과 다른 사회였다.

이익주 역사학자·서울시립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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