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시론]블록체인, 국제 결제망을 다시 설계하는 기술

2025-03-17

국내에서의 송금은 단 몇 초면 완료된다. 하지만 국경을 넘는 순간 이야기는 달라진다. 해외로 돈을 보내는 일은 여전히 복잡하고, 시간이 오래 걸리며, 수수료도 만만치 않다. 디지털 금융 시대에도 국제 송금은 여전히 불편하고 비효율적이라는 점은 이해하기 어렵다.

최근 소액해외송금 핀테크 기업들이 빠르고 간편한 서비스를 제공하지만, 송금 한도가 제한적이라는 점에서 여전히 아쉬움으로 남는다. 결국 국제 송금의 구조 자체를 바꾸지 않는 한, 근본적인 개선은 어렵다.

현행 국제 송금 시스템의 중심에는 스위프트(SWIFT:Society for Worldwide Interbank Financial Telecommunication)가 있다. 1970년대에 도입된 이 네트워크는 전 세계 금융기관 간 메시지를 주고받는 역할을 해 왔으며, 오랫동안 글로벌 금융의 표준으로 자리 잡아왔다. 하지만 SWIFT는 메시지 전달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실제 자금 이동은 중개은행을 거쳐 별도로 처리된다. 특히 송금기관은 거래를 원활히 하기 위해 미리 외화 자금을 상대 금융기관의 노스트로 계좌에 예치해야 하며, 이로 인해 자금의 유동성이 제한되는 문제가 발생한다. 오랫동안 이러한 방식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지만, 국제 송금의 효율성과 확장성을 저해하는 구조적 문제로 작용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시도로 주목받고 있는 기술이 바로 블록체인이다. 블록체인은 거래 데이터가 네트워크에 참여하는 기관들 사이에 실시간으로 공유되고, 합의를 통해 검증되며, 이후 변경할 수 없도록 기록되는 분산형 시스템이다. 이러한 특성은 결제의 신뢰성과 투명성을 높이고, 실시간 거래 처리를 가능하게 한다.

블록체인 기반 결제 시스템에서는 메시지와 자금 흐름이 하나의 통합된 프로세스 안에서 동시에 처리되도록 설계할 수 있다. 거래가 시작되면 수취인의 계좌 상태, 환율, 수수료 등이 즉시 확인되고, 송금이 완료되었는지도 실시간으로 파악할 수 있다. 중개기관 없이 네트워크 자체가 거래를 검증하고 기록하므로, 처리 시간과 비용이 줄어들고 오류 발생 가능성도 낮아진다.

특히, 디지털 자산과 결합될 때 그 잠재력이 더욱 커진다. 예를 들어 송금자가 원화를 디지털 자산으로 전환해 전송하고, 수취인이 이를 현지 통화로 교환하는 방식이라면, 환전과 결제가 거의 동시에 이뤄진다. 이 경우, 별도의 사전 예치금 없이 자금 전달이 가능해져 송금기관의 유동성 부담이 없어진다.

물론, 이런 시스템이 현실화되기 위해서는 제도적 기반이 필수적이다. 블록체인과 디지털 자산이 국제 결제에 본격적으로 활용되기 위해서는 각국 간 규제 체계의 정합성과 법적 명확성이 먼저 마련되어야 한다. 현재까지는 디지털 자산의 법적 지위가 국가마다 다르고, 자금세탁방지(AML), 고객확인(KYC), 소비자 보호 등에서도 제도적 준비가 필요하다.

국제사회도 적극 대응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과 금융안정위원회(FSB)는 디지털 자산에 대한 국제 기준 마련을 추진 중이며, 유럽연합은 MiCA(Markets in Crypto-Assets) 규제를 통해 제도화를 선도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가상자산 이용자 보호법' 시행과 함께 금융위원회 내에 '가상자산위원회'를 운영하고 있으며, 국회에서는 후속 입법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제도가 정비되고 기술이 안착된다면, 블록체인은 국제 금융 인프라의 새로운 표준이 될 수 있다. 실제로 일부 국가와 금융기관들은 블록체인 기반의 메시지 시스템과 거래 추적 기능을 활용해, 디지털 자산 없이 기존 방식보다 더 효율적인 송금 서비스를 구현하고 있다. 디지털 자산을 직접 송금 수단으로 사용하는 사례도 확대되고 있으며, 이를 통해 환전과 결제가 동시에 이뤄지고 노스트로 계좌 없이도 자금 이전이 가능해지는 등, 처리 속도와 유동성 측면에서 더욱 큰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지금은 국제 결제 시스템의 패러다임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단순히 속도를 높이는 수준을 넘어, 메시지와 자금 흐름을 하나로 통합해 실시간으로 처리하는 새로운 구조가 요구되고 있다. 블록체인은 이러한 구조적 전환을 실현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기술이며, 앞으로의 금융 인프라를 재정의할 핵심 수단으로 주목받고 있다.

기술은 이미 준비되어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이를 뒷받침할 제도와 정책이다. 각국이 긴밀한 협력을 바탕으로 현명한 선택을 해 나간다면, 블록체인은 국제 금융의 미래를 다시 설계하는 기술이 될 것이다.

이근주 한국핀테크산업협회장·한패스 공동대표

〈필자〉이근주 한국핀테크산업협회장은 동국대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전통 금융권에서 국내은행의 SWIFT 통신망 도입 당시 IT 실무를 총괄했다. 핀테크 초기에는 은행권 공동 오픈 API 플랫폼의 구축을 주장하며 오픈뱅킹 기반 마련에 기여했다. 이후 핀테크 영역에서 활동을 이어가며 동국대 겸임교수, 소상공인간편결제추진단장, 한국간편결제진흥원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는 소액해외송금 핀테크기업 한패스(주) 공동대표와 520여개 회원사를 둔 한국핀테크산업협회 회장직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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