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과 혐오를 딛고 소년이 도달한 곳은

2024-07-18

멜라닌|

하승민 지음 |한겨레출판 |311쪽 |1만6800원

지난 15일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JD 밴스 상원 의원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JD 밴스 의원은 2016년 출간한 자서전 <힐빌리의 노래>로도 유명하다. 백인 빈곤 가정에서 자란 그는 이 책에서 ‘힐빌리’ ‘화이트 트래시(쓰레기 백인)’ 등으로 조롱당하는 백인 하층 계급의 생활상을 비판적으로 묘사한다. 폭력적인 환경 속에서 빈곤과 소외를 겪으며 자란 그가 반이민 정책 등 또 다른 폭력과 차별을 정치적 동력으로 삼는 트럼프 대통령의 러닝메이트가 됐다는 사실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실망을 표하기도 한다. 한때 그가 지니고 있었을 소수자성은 다른 소수자들을 이해하는 통로가 되기보다는 차별과 혐오를 강화하는 시스템의 동력으로 환원됐다.

소설 <멜라닌>은 인종차별이 들끓는 미국 사회에서 소수자 중의 소수자인, ‘파란 피부’의 이민자 재일의 이야기를 담은 성장소설이다. 재일은 한국인 아버지와 베트남인 어머니 사이에서 ‘파란 피부’로 태어났다. 소설은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파란 피부’라는 환상적인 설정을 토대로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혐오가 가해지는 맥락을 첨예하게 파헤친다. 전 세계에서도 희귀한 ‘파란 피부’ 재일은 언제든 폭력에 노출될 수 있다는 공포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다는 고립감 속에서 살아간다. 그런 재일에게 어른들은 비뚤어지지 말고 바르게 자라야 한다는 조언을 한다. 누군가는 파란 피부는 소수자 집단인 만큼 개인이 쉽게 대표성을 띠기에 잘못된 행동을 해서는 결코 안 된다고 한다. 또 다른 누군가는 멸시의 대상인 파란 피부를 가릴 수 있는 건 초록색(달러)뿐이라며, 공부를 열심히 해 돈을 많이 벌라고 한다. 재일은 ‘파란 피부’의 정체성에 자신을 가두지 않는 한편, 부를 통해 ‘파란 피부’의 정체성을 초월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재일은 자유로운 개인으로서 자신이 지닌 소수자성을 통해 다른 소수자들에게로 나아가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소설은 미국 사회에서 재일이 “가장 낮은 계급”인 ‘파란 피부’이기에 겪어야 하는 차별과 멸시를 자세히 묘사한다. 과거 백인과 흑인의 좌석을 분리하기 위해 붙였던 ‘colored’ 표식처럼, 재일이 앉을 스쿨버스 자리에는 ‘blued’라는 딱지가 붙는다. 교사는 재일을 아시아인을 비하하는 용어인 ‘챙’이라는 멸칭으로 부른다. 마을의 보안관은 합리적인 근거도 없이 번번이 재일을 범죄자로 의심한다. 그는 마지막까지 무고한 재일을 의심한 것에 대해 사과하지 않으며 “여기는 너와 어울리지 않는다”라며 지역공동체에서 그를 추방하는 낙인을 찍어버린다.

어떤 집단에서도 어울리지 못하고 언제나 혼자였던 재일은 극단적인 소외감을 느낀다. 삼촌에게 이끌려 간 스트립쇼에서 뒤엉켜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을 보며 재일은 생각한다. “흑인 남자와 백인 여자, 백인 남자와 흑인 여자, 유럽, 아시아, 아랍, 라틴. 파란 피부는 어떤 조합에서도 어울리지 않았다. 타인의 몸을 핥는 파란 피부를 상상할 수 없었다. 그건 같은 종이 벌이는 행위가 아닌 것 같았다. 파란 피부는 탁자나 의자 위에 장식장처럼 놓여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어떤 집단에도 소속감을 느껴보지 못했기에 그에게는 ‘디아스포라’로서 느끼는 민족적 정체성이나 소속감도 없다. “‘칭챙총’은 내게 비하의 단어가 아니었다. 짜증이 났지만 영혼에 상처를 입힐 정도는 되지 못했다. 소속감의 부재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 정체성에서 아시아인이 차지하는 비중은 그리 크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외롭고 험난한 미국 생활에도 재일을 돕는 이들이 나타난다. 재일을 아들처럼 보살피는 강우 삼촌, 재일과 같은 파란 피부를 지닌 클로이, 인종차별적 공격으로부터 재일을 보호하는 셀마 등이다. 재일은 이들 사이에서 생전 처음 안정감과 포근함을 느낀다. 하지만 재일은 자신을 아끼고 보호해주던 이들이 죽거나 멀리 떠나게 되면서 상실감과 공포, 증오에 휩싸이게 된다.

소외, 고립, 상실, 공포, 증오…소수자로서 슬픔과 고통의 긴 여정을 통과한 재일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더 이상 백인을 우러르지도, 흑인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누군가를 선망하지도 경멸하지도 않았다. 인간을 무채색으로 만들고 나면 가진 것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사람들, 일터와 인간관계에 지친 사람들, 애국심과 규율로 무장한 벙커에 숨어 떨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우리는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였다. 우리는 어둠 속에서 서로를 공격하고 있었다.”

소설은 결말에 이르러 ‘파란 피부’인 ‘블루멜라닌’이 점점 더 많이 태어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한다. 2022년만 해도 ‘블루멜라닌’은 전 세계에 1200명에 불과했는데, 2023년에는 1만3000명이 새로 태어났다. ‘블루멜라닌’의 증가는 특정 정체성을 넘어 인종의 구별 자체를 넘어서려는 ‘재일’과 같은 다양한 개인들의 출현을 암시하는 희망적인 메시지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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