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디 맥베스

2025-08-17

“오라, 인간의 생각을 주관하는 악령들이여, 나를 여자의 몸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가장 무자비한 잔혹함으로 채워 주소서.”

셰익스피어의 『맥베스』 속 레이디 맥베스는 남편을 부추겨 살인을 저지르게 하고 왕좌를 빼앗게 한다. 이 대사는 그 과정에서 ‘여성성’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며 레이디 맥베스가 절규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은 권력욕과 음모의 상징이자, 정치 지도자의 몰락 뒤에는 ‘위험한 아내’가 있다는 여성혐오 서사의 기원이 됐다.

최근 전직 대통령 부부의 몰락은 이런 고전적 이미지와 비극적 결말마저 닮아간다. 로이터는 김건희 여사의 개인적 추락에 초점을 맞춘다. 화려했던 청와대 생활은 사라지고, 서울구치소 독방에서 한 끼 1700원 남짓한 식사를 한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를 곧바로 ‘악녀’ 개인의 서사로 받아들이는 것은 역사를 왜곡하는 함정이다. 김 전 여사에게 제기된 뇌물수수, 주가조작, 영향력 행사 혐의는 모두 법정에서 다퉈야 할 사안이다.

고대 로마의 메살리나는 방탕과 음모의 화신으로 기록됐으나, 이는 당대 정치적 의도가 짙었다. 필리핀의 이멜다 마르코스, 말레이시아의 로스마 만소르 역시 혐의가 사실로 드러났지만, ‘권력 뒤의 여인’이라는 낡은 구도가 남성 지도자의 책임을 희석시켰다. 부패의 구조적 문제보다 아내 개인의 욕망이 과도하게 부각된 것이다.

『맥베스』가 집필된 1606년은 엘리자베스 1세의 45년간 선치의 시대가 끝난 직후였다. 레이디 맥베스는 단순한 악녀, 권력의 부속물이 아니라 야망과 죄책감, 냉혹함과 취약함이 뒤섞인 복합적 인물로, 16세기 말 영국사회 모럴이 허락하는 여성 최고 권력의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비춘다. 우리는 이번 사건을 “남편을 타락시킨 부인” 서사로 소비하지 않고, 부패한 권력 구조를 직시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김승중 고고학자·토론토대 교수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