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색 감추는 중국 전략
중국 가전 기업들이 일본에 이어 북미·유럽 시장으로까지 세력을 넓히고 있다. 단순히 ‘가성비’ 제품을 내세우는 전략이 아니다. 현지 유력 브랜드를 통째로 사들이는 인수합병(M&A)으로 ‘메이드 인 차이나’라는 꼬리표를 교묘히 감추고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있다.
한때 ‘외산 가전의 무덤’이라 불리던 일본을 요즘은 중국 가전 기업들이 장악했다. 일본은 소니·파나소닉·미쓰비시 등 굴지의 전자 기업들이 많아 외국 브랜드엔 폐쇄적인 편이다. 그러자 중국 기업들은 일본 브랜드를 인수하고, 그 이름을 유지하면서 제품을 출시하는 현지화 전략을 취했다.
하이센스는 2017년 도시바의 TV 사업을, 메이디 그룹은 도시바의 생활가전 사업을 인수했고 샤프는 대만의 폭스콘에 넘어갔다. 하이센스는 도시바를 인수한 뒤에도 도시바가 평면 TV 제품에 사용하던 브랜드명 레그자(Regza)를 그대로 유지했다. 인수된 사실을 모르는 소비자가 일본 제품으로 생각해 구매를 이어가는 점을 노린 것이다.
M&A로 중국 색을 감추는 전략은 적중했다. 일본 BCN리서치에 따르면 지난해 일본 평면 TV 시장에서 중국 기업 점유율은 50%를 넘었다. 관련 통계를 집계한 2004년 이래 처음이다. 약 4%에 불과했던 2016년에 비하면 비약적인 성장세다. 1위는 하이센스가 인수한 레그자(25.4%)다. 하이센스(레그자 제외) 제품 점유율(15.7%)과 또 다른 중국 가전기업 TCL(9.7%) 점유율을 합치면 총 50.8%다. 일본 기업인 소니는 9.6%, 파나소닉은 8.8%에 머물렀다. 중국에 밀린 파나소닉은 지난 2월 TV 사업을 철수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고 밝혔다.
중국 기업의 M&A 전략은 일본에 국한되지 않는다. 2016년 미국 제너럴일렉트릭(GE) 가전 부문을 54억 달러(당시 약 6조5000억원)에 인수한 중국 하이얼은 GE의 점유율을 그대로 흡수했다. 시장조사업체 트랙라인이 발표한 지난해 미국 내 가전 6종의 시장 점유율을 보면 GE는 17%로 LG(21.1%), 삼성(20.9%)에 이은 3위다. GE를 인수하기 전 하이얼의 미국 내 점유율은 1% 수준이었다.
하이얼 그룹은 뉴질랜드의 피셔앤파이클, 이탈리아의 캔디 등 각국의 글로벌 가전 업체도 인수하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중국은 유럽 빌트인 시장에도 공 들이고 있다”라며 “전통있는 현지 브랜드를 인수해 진입하기 어렵기로 유명한 유럽 B2B(기업 간 거래) 시장에 들어가려는 전략”이라고 말했다. 앞서 류재철 LG전자 HS 사업본부장은 지난해 4월 이탈리아에서 열린 ‘밀라노 디자인위크 2024’ 기자간담회에서 “가장 위협적인 업체가 하이얼”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중국의 전방위적 공세는 한국 기업도 위협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옴디아에 따르면 지난해 글로벌 TV 출하량 기준 중국 기업(31.3%) 점유율은 한국 기업(28.4%)을 처음으로 추월했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인공지능(AI) 기술을 앞세운 신제품을 내세우는 동시에 신시장을 공략하고 있다.
돌파구로 점찍은 건 인도다. 글로벌 시장조사기관 레드시어리포트에 따르면, LG전자는 지난해 상반기 인도에서 세탁기(33.5%), 냉장고(28.7%), TV(25.8%), 에어컨(19.4%) 모두 점유율 1위를 기록했다. LG전자는 올해 5월 인도 법인을 상장해 최대 15억 달러(약 2조2000억원)의 자금을 조달하고, 인도를 포함한 서남 아시아 시장에 특화된 제품 개발에 투자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