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48명 아이들의 다잉메시지
‘정인이법’ ‘민식이법’…. 학대와 사고로 세상을 떠난 아이의 이름을 딴 법이다. 큰 사건이 터지면 일사천리로 없는 법까지 만들지만 대부분 아동은 왜, 어떻게 사망했는지 검토하지 않은 채 사망 처리된다. 반면에 미국·영국·일본은 일찍 아동사망검토제(CDR)를 도입해 재발을 막을 예방책을 찾는다. 중앙일보는 국과수가 최근 10년간 부검으로 확인한 3048명의 아이들이 남긴 ‘다잉메시지’를 통해 어른들이 관심과 주의를 조금 더 기울였다면 막을 수 있는 죽음이 많다는 사실을 심층 취재했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당시 총리가 2022년 1월 17일 일본 국회 시정연설에서 ‘예방을 위한 아동사망검토제(Child Death Review·CDR)’ 도입을 발표했다. 소아과 의사 출신인 지미 하나코(自見英子) 자민당 참의원이 발의한 제도였다. 지난달 5일 도쿄(東京) 지요다(千代田)구 참의원 회관에서 만난 지미 의원은 “6살 외아들을 먼저 떠나 보낸 요시카와 유코(53·吉川優子)씨와의 7년 전 만남이 CDR 추진을 결심한 계기였다”고 말했다.
일본 CDR 만든 6살 외아들 잃은 엄마와 소아과 의사 의원
2012년 7월 20일 사립 유치원 수학여행을 간 요시카와 신노스케(吉川慎之介)군은 강에서 물놀이하던 중 급류에 휩쓸려 목숨을 잃었다. 그날 오전 신노스케군은 출장이 잦은 아빠처럼 “출장 다녀오겠습니다”라며 집을 나섰다가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 요시카와는 아이가 어떻게 사고를 당한 건지 알고 싶었지만 유치원으로부터 자세한 설명을 듣지 못했다. 결국 다른 학부모의 힘을 빌려 현장 검증을 했다. 그 결과 ▶사고 당시 아이들은 구명조끼를 착용하지 않았고 ▶유치원에서 날씨를 미리 확인하지 않았으며 ▶선생님들이 공황 상태에 빠져 적절한 구조가 이뤄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더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었다. 수사기관은 기소하기 전엔 수사 내용을 밝힐 수 없다고 했고 사고가 발생한 지방자치단체인 에히메(愛媛)현과 사이조(西条)시는 사립 유치원을 조사할 권한이 없다고 했다.
요시카와는 스스로 움직여야겠다고 결심했다. 2014년 아이 이름을 딴 기념 재단와 어린이안전학회를 발족했다. 전국을 다니면서 익수 사고의 위험과 어린이 수상 안전을 강조하는 활동을 펼쳤다. 그러자 에히메현은 강가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수위가 높아지면 문자로 경고하는 시스템을 마련했다. 사이조시는 소방서에서 유아용 구명조끼를 빌릴 수 있도록 했다.
사고 4년 뒤 유치원 원장에게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벌금 500만원이 선고됐다. 그제야 열람한 수사 자료엔 재발 방지를 위한 제언이 많았다. 요시카와는 “100명 넘는 인력이 수사에 투입되고 비용도 많이 들었을 텐데 선생님을 유죄로 만드는 증거로만 쓰이는 게 맞을까 생각했다”며 “처벌만 이야기하면 누군가의 잘못으로 끝나지만, 예방은 모두가 자신의 일로 생각할 수 있게 만든다”고 강조했다.
처벌을 넘어 예방으로, 아동사망검토제(Child Death Reivew)
올해 기준 도쿄도를 포함한 11개 도·도·부·현(都道府県·지자체)이 CDR 시범 사업을 시행하고 있다. 2022년 한 해에만 200여 개 사망 사건을 검토했고, 그중 70%에 대해 예방책을 제안했다. CDR 제정에 기여한 의사 출신 야마나카 타츠히로(山中龍宏) 세이프키즈 재팬 이사장은 “동그란 캡슐을 삼켜 죽은 아이가 여럿 있어 알아보니 한 제약회사에서 사은품으로 만든 게 드러나 제작을 중단하라고 했다. ‘왜?’라고 물으면 예방할 수 있는 게 반드시 보인다”고 말했다. 누마구치 아츠시(沼口敦) 일본 소아과학회 CDR위원장은 “CDR은 처벌이 아닌 창조적 논의를 목표로 한다”고 말했다.
해외에서 시행 중인 CDR 사례를 보면 지역자치단체 단위에서 먼저 분석·검토가 이뤄진다. 일본은 도·도·부·현, 미국은 주(state) 등에서 의료·법조·복지 등 전문가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관내에서 발생한 아동사망의 원인 등을 검토하는 식이다. 미국에서 CDR을 처음으로 시행한 캘리포니아주(州)의 경우, 미리 확보된 수사·의료 자료 등을 토대로 소아과 의사, 법의관, 경찰, 아동복지사 등 전문가 8~12명이 모여 사망 전후 상황뿐 아니라 아동의 전 생애를 재구성한다. 학대 이력, 복지 서비스 이용 여부, 양육 환경, 경제 상황, 건강 상태, 보육원 또는 학교생활부터 친부모가 어렸을 때 학대 피해를 봤는지까지 확인한다. 사고사 등의 경우 전문가 조언도 듣는다.
보통 수사·재판이 끝난 뒤 시작되지만, 긴급한 경우 선제적 검토가 이뤄지기도 한다. 미 오클라호마대에서 CDR을 연구한 야마오카 유이(山岡祐衣) 도쿄과학대 공중위생학과 교수는 “가령 학대로 사망한 아동의 생존 형제가 있을 경우 필요한 조치가 무엇인지 살펴야 시의성 있는 대안을 내놓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지역 단위에서 분석·검토된 내용은 중앙 정부로 보고된다. 미국의 ‘아동사망검토 및 예방센터(The National Center for Fatality Review and Prevention)’와 일본의 아동가정청 등이다. 취합된 내용은 심층 연구 및 예방책 수립에 활용된다. 캘리포니아주 콘트라코스타 카운티 아동사망검토위원회에서 40년간 일한 소아과 전문의 짐 카펜터 박사는 “죽음의 분류(classification)와 원인(cause)은 다른 개념”이라며 “아동사망 유형을 자살·사고사·병사 등으로 분류하는 것을 넘어 발생 원인을 분석하고, 막을 수 있던 죽음이었는지 판단해,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 CDR의 역할”이라고 강조했다.
글 싣는 순서
1화 - 아이들의 ‘숨은 죽음’
2화 - 죽음 막는 아동학대 프로파일링
3화 - 우연한 아동 사고사는 없다
4화 - 아동사망검토, 해외는 어떻게?
※아래 링크에서 시리즈 기사를 읽어보세요.
https://www.joongang.co.kr/series/11693
도쿄·가마쿠라=이영근 기자, 이수민·이찬규 기자 lee.youngkeu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