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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이 표류하는 국민연금 개혁에 대해 세 가지 중대한 원칙을 제시했다. 청년 세대로선 가뭄에 단비처럼 반가운 소식이다. 이대로 가면 기성세대가 무책임하게 떠넘긴 막대한 연금 적자를 청년 세대가 고스란히 떠안을 판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급해도 개혁의 방향을 잘못 잡으면 오히려 안 하느니만 못한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각종 이익집단의 이해관계에 휘둘리지 말고 정부가 중심을 잡아줘야 하는 이유다.
최 대행은 지난 11일 국무회의 모두발언에서 “누구도 과도한 부담을 지지 않으면서 국민연금이 안정적으로 운영되기 위해서는 ‘더 내고 덜 받는’ 사회적 합의가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여야가 국회에서 하루속히 합의안을 도출해 주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이날 최 대행의 발언은 길지 않았지만, 백 마디 말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담았다. 연금 개혁 논의에서 가장 중요한 3대 원칙을 분명히 밝혔기 때문이다. 첫째는 더 내기, 둘째는 덜 받기, 셋째는 사회적 합의다.
더 내고 덜 받기와 사회적 합의
세대 간 형평성 위한 필수 조건
18년 전 ‘노무현 개혁’ 기억해야
사실 최 대행이 제시한 3대 원칙은 18년 전 노무현 대통령이 주도했던 연금 개혁의 원칙과 정확히 일치한다. 당시 노 대통령은 연금 보험료율 인상(더 내기)과 소득대체율 인하(덜 받기)를 골자로 한 연금 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했다. 다만 국회 본회의 표결에서 연금 개혁 법안이 한 차례 부결되는 진통을 겪으며 연금 보험료율 인상은 빠졌다.
결국 노 대통령 임기 말인 2007년 7월 국회 본회의에서 여야 합의(사회적 합의)로 국민연금법 개정안이 통과됐다. 당시 노 대통령은 절반이라도 재정 안정성을 도모하는 개혁이 이뤄진 것에 대해 굉장히 뿌듯해했다는 게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의 회고다. 노무현 정부에 대해선 다양한 평가가 있겠지만, 적어도 연금개혁에선 청년 세대와 미래 세대를 위해 귀중한 성과를 남겼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정작 ‘노무현 정신’을 계승한다고 자처하는 더불어민주당이 노무현 정부의 연금 개혁을 부정하고 나선 것은 아이러니다. 민주당의 요구는 연금 보험료율과 소득대체율의 동시 인상, 즉 더 내고 더 받기다. 18년 전 노무현 정부의 연금 개혁을 완전히 거꾸로 되돌리자는 발상이다. 더 내고 더 받기는 역대 정부에서 한 번도 시도한 적이 없다. 연금 재정이 안정되기는커녕 장기적으로 더욱 악화할 게 명확하기 때문이다. 민주당이 진정으로 연금 개혁을 하자는 것인지, 오히려 연금 개악을 하자는 것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국회 예산정책처의 분석 자료를 봐도 분명히 알 수 있다. 노무현 정부가 마련한 연금 개혁 스케줄에 따라 소득대체율은 단계적으로 40%(2028년 기준)까지 내려갈 예정이다. 그런데 일부 민주당 의원이 낸 법안대로 소득대체율을 45%로 끌어올리려면 1544조원이 추가로 필요하다는 게 국회 예산정책처의 분석이다. 올해 말 기준으로 정부가 예상한 국가채무 총액(1273조원)보다도 훨씬 큰 금액이다.
도대체 그 돈은 누가 갚을 것인가. 현재 청년 세대나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미래 세대가 이 빚을 떠안을 수밖에 없다. 연금 개혁의 가장 큰 목적인 세대 간 형평성에 전혀 맞지 않는다. “소득대체율 인상이 포함된 연금 개혁은 대놓고 미래 세대를 약탈하겠다는 선언과 다르지 않다”(지난 4일 연금연구회 기자회견)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일반적인 상속 부채라면 민법에 따라 자녀가 상속을 포기할 수도 있다. 그런데 조부모 세대와 부모 세대가 물려준 연금 부채는 자녀 세대가 아무리 원해도 상속을 포기할 수조차 없다.
소득대체율 몇%포인트 인상이 얼핏 작아 보이지만 금액으로는 1000조원을 넘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이런 식이라면 국제통화기금(IMF)이 경고한 2070년 국가부채 비율 200%도 불가능한 시나리오가 아니다. 기획재정부 장관인 최 대행이 이제라도 더 내고 덜 받기의 원칙을 분명히 밝힌 것은 다행스럽다.
연금 개혁의 셋째 원칙인 사회적 합의도 다른 두 가지에 못지않게 중요하다. 여기서 사회적 합의는 국회에서 여야 합의를 뜻한다. 역대 정부의 연금 개혁도 그랬다. 1998년 김대중 정부 때도, 2007년 노무현 정부 때도 연금 개혁 법안은 여야 합의로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 아무리 원내 다수 의석을 차지한 야당이라도 연금 관련 법안을 일방적으로 밀어붙인다면 정당성을 얻을 수 없다. 집권 여당이면서 구체적인 대안도 내지 못하고 야당에 끌려다니는 국민의힘도 잘한 것은 하나도 없다. 수십 년에 걸쳐 사회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는 연금 개혁에서 여야 정치권의 합의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