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필자가 까까머리 중학생 때 일이다. 수업시간에 장난을 친 친구 둘이 선생님께 불려 나갔고, 선생님은 서로의 뺨을 때릴 것을 명했다. 처음엔 마지못해 때리는 척하던 친구 녀석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눈에 쌍심지를 켜고 씩씩거리면서 상대방 뺨을 때리는 팔의 각도가 180도를 넘어섰고, 교실 내에선 파열음이 메아리쳤다. 그런데 그 오래된 풍경이 우리에겐 매일 기시감으로 다가온다. 다만 두 뺨은 여, 야로 바뀌고 손바닥들이 언어로 바뀌었을 뿐이다.
정치인들의 ‘뺨 때리기’ 게임을 하나 하나 살펴보면 날이 새도 모자랄 것이기에 여, 야 정당 대표 선수들의 ‘갈라쇼’만 톺아보자. “악수는 사람하고 하는 것”, “이재명과 김어준 똘마니”, “입으로 오물 배설... 냄새나니 입이나 닦아라”, “반헌법적 정치테러 집단의 수괴”... 정청래와 장동혁 대표가 주고 받는 ‘티키타카’는 가히 수준급이다. 여기에서 필자는 정청래 대표의 발언에 더 주목한다. “악수는 사람하고 하는 것”이라며(결국 악수는 했지만) 야당 대표를 저격한 발언은 “윤석열이 범죄 피의자라며 이재명을 보이콧했던 것과 뭐가 다르냐?”는 부메랑으로 돌아오고 있다. 생각이 다르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국민을 ‘섬김’이 아닌, ‘섬멸’하려 든 지도자를 불과 수개월 전에 생생히 목도하지 않았던가! 그리고 ‘윤 어게인’을 외치는 세력에 대해 분통을 터뜨리는 국민들이 다수이지만, ‘개딸’에 대해서도 염증을 느끼는 국민 역시 적지 않음도 직시하시라!
‘정치는 언어의 예술”이라 했다. 하지만 지금의 정치 언어는 예술이 아니라 무기, 아니 흉기에 다름 아니다. 누가 더 세게 말하고 누가 더 자극적으로 공격하는가가 ‘정치력’으로 오인되고 있다. 한쪽이 말의 무기를 휘두르면 다른 쪽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흉기로 받아친다. 막말은 상대의 귀를 때리지만, 그 메아리는 국민의 가슴을 때린다. 때문에 국민들은 붉게 얼룩진 정치권의 뺨들을 바라보며 긴 한 숨을 내쉴 수 밖에... 왜 정치가 국민을 걱정하지 않고, 국민이 정치를 걱정해야 하나?
“야당이지만 A 의원께서 지적하신 점은 일리있다고 봅니다”, “여당 의원께서 이렇게 마음의 문을 열어주시니 일이 잘 풀릴 것 같습니다, 그려.” 정치권에서 이런 대화가 오가는 상상은 언제까지 넌센스여야 하나? 경제발전은 초스피드로 선진국인데 우리 정치발전은 왜 아직도 개발도상국일까?
깨끗하고 품위 있는 정치는 종종 ‘뜨거운 얼음’에 비유되곤 한다. 진정 절제된 언어 속의 품위 있는 정치는 ‘뜨거운 얼음’처럼 존재할 수 없는 것일까?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켄슈타인은 언어의 품격을 이렇게 역설했다. “내 언어의 한계가 곧 내 세계의 한계다.”
사람에게 인격이 있듯, 정치인에게도 그 얼굴에 걸맞는 품격이 있어야 한다. 그런 품격을 갖추지 못한 채, 숱하게 한계를 드러내고서 우리네 가슴속에서 긴 한숨을 뽑아내는 정치인에 대해선 유권자들이 회초리를 매섭게 들어야 한다. 지난 긴 추석 연휴 밥상에 이어 연일 날아드는, 투박하다 못해 천박한 정치권 언어들을 곱씹다보니 ‘뜨거운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땡긴다.
이균형 전북 CBS 대표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언어의 예술과 한계
기고 gigo@jjan.kr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