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 전환 비용 낮추고 연금·노동 개혁 서둘러야

2025-10-19

‘고비용·저생산성’에 갇힌 유럽 닮아가는 한국

프랑스의 연금 시위, 영국의 재정난, 독일 제조업 몰락과 경제 성장률 하락 등이 연일 뉴스로 보도되고 있다. 유럽이 직면한 경제난은 일시적 현상이 아니다. 독일은 2024년 국내총생산(GDP)이 전년 대비 0.2% 감소하며 2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고 2025년에도 경제가 뒷걸음하는 3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이 예상된다. 독일 제조업은 자국 공급망을 상실하고 가격 경쟁력에서 밀리며 수출에서도 힘을 잃어가고 있다.

연금 개혁 저항에 직면한 프랑스

제조업 약화, 마이너스 성장 독일

포퓰리즘이 불러온 재정 악화 속

미흡한 구조 개혁에 경쟁력 상실

유럽이 걸어온 길 따라가는 한국

미래세대 위한 건전재정 나서야

영국은 GDP 대비 재정적자가 4.8%에 달하고 금융산업이 붕괴하고 있지만 확장적 재정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현재 재정 부채가 가파르게 늘면서 국제통화기금(IMF)에게 도움을 요청할지도 모르는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다. 프랑스는 GDP 대비 국가부채가 113.9%로 유로존 내 최대 규모로, 연금 현실화를 위한 연금 보험료 인상의 연금 개혁에 대한 반대 시위가 전국에서 이어지며 몸살을 앓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개별 국가의 문제를 넘어 유럽 전체의 구조적 문제를 드러내며 한국에도 중요한 정책적 교훈을 제공한다. 이러한 일을 10년 전에 예측한 사람이 있는데 리콴유 전 싱가포르 수상이다. 그는 영국에서 유학한 경험과 지도자로서 전 세계를 돌면서 느낀 여러 나라와 인물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를 담아서 『리콴유의 눈으로 본 세계』라는 책을 저술했다.

리콴유는 이 책에서 현재 유럽이 겪고 있는 심각한 경제 문제의 원인을 진단하며 유럽의 복지국가 제도에 대한 단상을 이렇게 밝혔다.

“세계화가 진행되며 기술력이 약한 유럽의 노동자는 유럽 내에서가 아니라 일본은 물론 나중에는 중국과 인도의 노동자와 경쟁해야 하는 상황이 됐다. 중국·인도·일본과 시장에서 경쟁하지 않았다면 유럽의 복지국가는 한동안 생명력을 유지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 국가의 등장으로 복지국가는 지속 가능할 수 없었고 길게 가지 못했다.” 리콴유는 더 나아가 “복지 혜택은 한번 제공되면 되돌리기가 어렵고 혜택을 축소하는 어떤 정부도 선거에서 처절한 대가를 치르게 된다. 유럽은 힘든 시간을 맞게 될 것”이라고 통렬하게 지적했다.

한번 시작된 포퓰리즘적 정책은 결국 재정 부족을 야기하고 이를 바로 잡으려 시도해도 민주적 선거 제도에서는 반발에 부딪혀 불가능한 정책이 돼 버리고, 능력 있는 인재는 그런 나라를 등지고 떠나는 악순환이 이어진다. 유럽의 경제 문제에는 다양한 원인이 있지만 통합 유럽에서 통화 정책이 무기력할 수밖에 없고 복지를 늘리거나 노동자를 달래려 시작된 재정 확대의 유혹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낳는지를 리콴유는 이미 알고 있었다.

과도한 복지로 재정 몰락한 유럽 경제

유럽 경제 문제의 원인은 과도한 복지와 그로 인한 국가 재정의 몰락만이 아니다. 마리오 드라기 전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2024년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에 제출한 ‘유럽 경쟁력의 미래’ 보고서에 따르면 1980년 기준으로 유럽이 글로벌 GDP에서 차지하던 비중은 약 30%로 미국보다 높았다. 그러나 지금은 약 17.3%로 미국(26.3%)보다 9%포인트 뒤쳐져 있다. 더 큰 문제는 중국이 이미 유럽 전체의 경제 비중을 다 따라잡고, 이미 더 큰 경제로 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드라기 보고서는 유럽이 ‘경쟁력을 상실한 대륙’이 됐음을 직설적으로 진단하면서 ①생산성 정체 ②혁신·디지털 격차 ③과도한 규제 ④에너지 비용 상승을 4가지 핵심 요인으로 지목했다. 유럽은 전통적인 제조업이 몰락하면서 글로벌에서 차지하는 경제적 비중이 급격히 축소됐고 그만큼 가난해지고 있지만,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재정을 확대해야 하는 수많은 일을 개혁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고비용·저생산성의 구조에 갇혀 있는 유럽은 중국이라는 거대한 경쟁자가 모든 분야에서 전 세계를 휩쓰는 상황에서 자국 산업의 경쟁력이 점점 하락하고 있음에도 과도한 지출을 줄이지 않았고 오히려 연금 지급을 늘렸다. 유럽의 과도한 복지는 노동 시장에서 역선택을 일으켜 능력 있는 인재보다는 복지 혜택을 노린 저임금 이민 노동자의 유입을 부추기는 우를 범했다.

유럽의 전통적인 제조업 몰락을 야기한 급격한 생산성 저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강력한 구조개혁이 필요하지만 유럽은 포퓰리즘의 악순환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미국에 기대던 국방비에도 천문학적인 비용을 지불해야 하지만 국가별 이해관계가 달라서 반발이 만만치 않다. 독일은 유럽의 안보를 지킨다는 명분 속 재정 지출을 가장 늘려야 하는 국가가 될 것이다.

재생에너지 비중 확대로 비용 급증

친환경에 몰두하면서 빚어진 에너지 비용 급증도 유럽이 직면한 주요 문제 중 하나다. 전 세계에서 가정용 전기요금이 가장 비싼 나라는 대부분 유럽 국가다. 친환경 전환에 가장 앞장서고 있는 영국의 전기요금은 최근 가파르게 상승했다. 친환경 선진국으로 불리는 독일은 한국의 전기요금 3배 정도를 내는 실정이다.

유럽의 에너지 단가 상승은 단순한 시장 변동이 아니라 정책·제도·인프라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먼저 독일 등 주요국이 추진한 탈원전 정책으로 안정적이고 저렴한 원자력 발전 비중이 축소됐고, 대신 재생에너지 비중 확대로 변동성 높은 전력 공급 구조가 자리 잡았다.

이와 맞물려 EU의 탄소가격제(ETS)는 화석연료 기반 발전에 추가 비용을 부과해 기업과 소비자의 전력 요금을 끌어올렸다. 게다가 송전망과 배전망 등 전력 인프라 투자가 정책·환경적 요인으로 지연되면서 지역별 전력 수급 불균형이 발생했다. 이에 따라 특정 시간대와 특정 지역에서 전기 단가가 급등하는 구조적 문제가 나타났다.

에너지 비용 상승은 유럽 산업 전반에도 큰 부담으로 작용했다. 제조업체는 높은 전기요금과 불확실한 공급을 감내하기 어려워 일부 생산기지를 해외로 이전하거나 공정 구조를 조정할 수밖에 없었고, 전력 집약적 산업에서는 수익성 악화가 나타났다. 특히 철강·화학·금속 등 전기 사용 비중이 큰 업종에서 경쟁력 약화가 두드러졌다. 장기적으로는 글로벌 공급망 재편에도 영향을 미쳤다.

지난 4월28일 발생한 스페인 정전은 유연한 전력망 개편 및 송전망 인프라 투자 등이 전제되지 않은 과도한 에너지 전환 정책이 정전을 불러와 막대한 인명 피해와 경제적 손실이 발생할 수 있음을 보여준 대표적 예다. 스페인 북부와 남부에서 208㎿의 풍력·태양광 발전이 원인 불명으로 차단된 뒤 57초 후 그라나다의 변압기가 과전압 보호장치로 멈췄고, 밀리 초 단위로 세비야·세고비아 등에서 2GW 이상의 재생에너지가 연쇄 차단되며 전압이 급등했다. 불과 90초 만에 이베리아 반도는 유럽 전력망과 동기화를 잃었고, 자동 부하차단도 붕괴를 막지 못했다.

탄소중립의 파급 효과 분석 필요

한국도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다. 태양광과 풍력 등 재생에너지 비중이 빠르게 증가하면서 전압과 주파수 조절이 어려워지고 있다. 재생에너지 확대가 먼저가 아니라 송전망 투자와 계통 안정화 기술이 우선적으로 선행돼야 한다. 송전망이 있어야 전기를 이송할 수 있고 60Hz에 맞춰서 실시간으로 수요와 공급을 일치시킬 수 있으며 정전이 발생하지 않는다. 실시간 모니터링 시스템 고도화와 빠른 주파수 응답(FFR) 자원 확충, 발전기 보호 설정 표준화가 시급하다.

독일·영국·스페인·프랑스에서 일어나고 있는 유럽 경제의 병폐를 통해 얻어야 할 우리의 교훈은 명확하다. 지속가능한 미래는 재정적으로 뒷받침돼야 한다는 사실이다. 또한 탄소중립은 피할 수 없는 미래지만 다양한 경제적 파급효과 분석과 에너지 시스템에 대한 종합적 고려가 필요하다. 우리 기업이 중국과 경쟁하는 거의 모든 전통적 분야에서 경쟁력을 상실하고 있고 미래 인공지능(AI) 분야에서 경쟁력을 확보할 수 있을지도 의문이 커진다.

최근 3년간 산업용 전기요금만 대폭 올린 탓에 2024년부터 이미 산업용 요금은 가정용 요금보다 비싸져 우리 기업의 수출 경쟁력을 잠식하고 있다. 이대로는 원가 경쟁에서 중국이나 타 경쟁국보다 뒤질 수밖에 없어 수출 기업의 재무적 위험이 커지고 있다. 이미 영업이익이 매출의 2~3%에 불과한 한계기업은 전기요금 인상이 오롯이 적자로 누적되기 때문에 한전의 전기요금 체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다양한 방안을 찾아 나서고 있다.

노동·복지 개혁 골든타임 잡아야

대한민국의 미래는 유럽과 달라야 한다. 이제는 근본적인 개혁을 늦출 수 없는 시점이다. 개혁에 착수해야 한다. 미래의 인구구조에 대처하고 산업구조 변화를 선도할 수 있도록 노동, 복지, 연금과 건강보험, 에너지 전환 등에 대한 적극적 개혁이 필요하다. 비용 유발자와 비용 부담자가 달라서는 안 된다. 또한 재정 건전성의 지속적 관리도 필수적이다. 한국의 상대적으로 양호한 재정 상황은 향후 정책 여력을 제공하지만 유럽 사례에서 보듯이 재정 건전성은 한번 악화하면 회복이 어렵다. 현재의 건전한 수준을 유지하면서 미래 세대를 위한 투자와 현재의 재정책임 사이의 균형을 찾아야 한다. 대한민국은 급격한 에너지 전환과 연금 개혁의 미봉, 재정 건전성에 대한 착시 등 유럽이 걸어온 3가지 경로를 이미 걷기 시작했다. 낙관에 기대어 개혁의 골든타임을 놓치면 10~20년 뒤 한국의 신문 1면은 지금의 유럽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조홍종 단국대 경제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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