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읽기]화두에 대하여

2025-12-01

소설을 쓰는 나는 사람들이 어떤 것에 관심을 두는지 궁금할 때가 많다. 대중교통을 타고 도심 한복판을 가를 때면 버릇처럼 좌우 사람들의 행동을 살짝 살피곤 하는데, 요즘은 대부분 손바닥에 있는 작은 네모를 들여다보고 있다. 책은 고사하고 멍하니 있거나, 창밖을 보는 사람들조차 거의 없다. 사람들의 눈길을 붙들고 있는 화면에는 으레 영상이나 쇼츠가 나오고 있다. 놀랍게도 그들의 표정에는 거의 색이 없다. 대부분 무심한 표정으로 가차 없이 화면을 넘긴다. 나라고 다를까.

사람들은 기계가 띄워주는 추천 영상에 거부감 없이 손가락을 움직인다. 쇼츠의 축제가 시작되면 생각할 필요가 없어진다. 오히려 깊은 생각을 금지하기라도 하듯 빠르게 다음으로 넘어간다. 몽상할 시간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주제가 가볍든 무겁든 다르지 않다. 쇼츠를 보는 순간에도, 이 글을 읽는 지금도 생각하고 있으니, 생각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 않냐는 반론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사람이 하는 모든 생각이 같은 농도인 건 아니다.

사전적으로 화두는 이야기의 말머리라는 뜻이지만, 선종 불교에서는 깨달음을 얻기 위해 수행자가 집중하는 문제라는 의미로 쓰인다. 고려 보조국사 지눌이 체계화한 한국 선불교의 대표 수행법인 ‘간화선(看話禪)’은 화두를 붙들고 큰 의심을 일으킨다는 뜻이다. 지눌은 ‘무(無)’를 화두로 들며 공부하되 의심을 끌고 갈 뿐, 겉알음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선종은 직관적 사고에 익숙했던 사람들의 의식구조를 바꾸기 위해 시작되었다.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에 관한 깊은 고민은 동서양을 가리지 않았다. 14세기 독일의 화가 알브레히트 뒤러는 신이 아닌 자신을 그렸다. 지금은 익숙한 자화상은 중세의 종교 중심 세계관에서 인본주의로 오며 나타난 사유의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다.

연말이면 다음 해를 관통하는 단어가 발표되곤 한다. 누구는 올해의 고사성어를 제시하기도 하고, 신조어를 만들어 퍼트리기도 한다. 그런데 요즘은 시대를 관통하는 단어조차 잘 떠오르지 않는다. 우리는 어떤 화두를 가지고 사는가?

오늘 새벽에 배송받기로 한 채소가 있다고 하자. 갑자기 배송을 받을 수 없게 됐다는 문자가 온다면, 당신은 어떻게 할까? 당장 쇼핑몰이나 배송회사에 연락해 불편 사항을 전할 수 있다. 배송기사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걱정할 수도 있다. 새벽배송의 어려움이나 배송기사들의 처우에 관해 생각할 수도 있다.

새벽배송을 받지 못했을 때 불편하다는 즉각적인 반응을 넘어, 새벽배송의 유지 또는 폐지와 관계없이, 배송 시스템 자체가 사회에 끼치는 영향에 관해 생각을 던지는 것이 화두의 시작이다. 많은 사람이 너무 많은 생각에 휩싸여 살고 있지만, 그중 화두가 없다는 건 불행한 일이다.

한 가지 화두로 생각을 유지하는 건 쉽지 않다. 게다가 계속해서 구해간 화두 끝에 찾아오는 결론이 완전한 해답이기도 어렵다. 요즘처럼 즉각적인 반응이 중요한 시대에, 완전한 해답이 구해지지 않는 사유가 흥미를 얻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자기 인생의 화두가 무언지 질문해본 사람은 안다. 정답 없는 삶에서 화두를 던지며 조금씩 의미를 찾아가는 과정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는 걸.

바야흐로 사유조차 소비하는 시대다. 사람들은 스스로 생각하는 대신 다른 이들이 만들어놓은 생각을 소비하는 것에 만족한다. 이제는 생각하기 자체를 인공지능에 기꺼이 넘기려 한다. 12·3 비상계엄을 겪은 지 곧 1년이 되는 오늘 자신에게 묻는다. 나는 정치적 화두를 콘텐츠로 소비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상황의 원인과 영향을 파악하기 위해 스스로 노력했는가, 사회는 1년 동안 나아갈 방향을 함께 모색했는가. 화두를 사유하지 않는 시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Menu

Kollo 를 통해 내 지역 속보, 범죄 뉴스, 비즈니스 뉴스, 스포츠 업데이트 및 한국 헤드라인을 휴대폰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