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은 물가가 떨어지지 않아서 걱정이고, 중국은 물가가 떨어져서 걱정이다. 미국에서는 끈적한 인플레이션에 대한 걱정이, 중국은 고착화되고 있는 디플레이션에 대한 우려가 크다. 미·중 양국의 물가 궤적은 상반된 모습이지만, 원인은 동일하다. 대체로 정부 탓이다.
미국의 인플레이션은 민주당과 공화당의 합작품이다. 바이든 정부는 정부 지출을 대폭 늘려 과잉수요를 만들어냈다. 바이든 집권기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재정적자는 연평균 7.5%에 달했다. 특히 코로나 팬데믹이 진정된 이후인 2023년과 2024년에도 각각 6.1%와 6.3%의 재정적자를 기록했다. 특별한 경제위기가 발생하지 않았던 상황에서 GDP의 6%가 넘는 재정적자는 과했다. 미국은 만성적인 재정수지 적자국이지만, 1980년대 이후 평균치인 3.5%를 훨씬 뛰어넘는 재정적자가 바이든 행정부 때 기록됐다. 큰 정부를 지향했던 미국의 진보주의자들이 맘껏 돈을 쓴 결과였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 과정에서의 보조금 지급, 친환경 투자 확대 등이 대규모 재정적자로 귀결됐다. 정부가 이런 식으로 수요를 만들어내면 물가가 안정되기 어렵다.
트럼프 정부의 정책도 인플레이션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시장과 정부의 역할 규정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트럼프는 ‘위장 보수주의자’다. 감세 정책을 쓰고, 일론 머스크를 수장으로 한 ‘정부효율부’를 신설해 작은 정부를 지향하는 것으로 포장했던 건 전형적인 경제적 보수주의자의 행보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트럼프는 재정지출을 줄일 생각이 없다. 정부 지출 축소를 주장했던 공화당의 정통 보수주의자들은 트럼프에게 인격모독에 가까운 면박을 받으면서 존재감이 희미해지고 있다. 정권교체 후 곧바로 재정지출이 조정되기는 어렵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트럼프 정부에서도 재정적자는 여전히 문제다. 트럼프 2기 행정부 출범 초기인 2025년 1분기와 2분기 GDP 대비 재정적자는 각각 6.9%와 6.3%에 달하고 있다. 감세가 민간의 수요를 자극하는 가운데, 정부 지출이 억제되지 않는다면 물가가 안정되기 어렵다. 여기에 8월부터 개시된 수입품에 대한 관세 부과도 공급 측면에서 물가를 자극하는 요인이다.
시장은 쇠하고 국가 영향력은 커져
미국 소비자물가지수의 전년 대비 상승률은 연준의 관리 목표치인 2%에서 멀어지면서 다시 3%를 향하고 있고, 생산자물가지수는 관세 부과의 영향으로 7월에 3%를 훌쩍 넘어섰다. 인플레이션에 대한 우려는 9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에서 기준금리 인하가 쉽지 않을 수도 있다는 관측으로 귀결되면서 최근 글로벌 증시 조정의 빌미로 작용하고 있다.
중국의 디플레이션은 보다 구조적이다. 중국의 7월 소비자물가지수는 전년 대비 0%를 기록했다. 2~5월의 4개월 연속 마이너스 물가에서는 벗어났지만, 여전히 경제는 디플레이션을 지향하고 있다. 소비자물가에 대해 선행성을 가지는 생산자물가지수는 2022년 10월부터 34개월 연속 전년 대비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있다.
물가가 하락하는 디플레이션은 수요가 약하거나, 공급이 많을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 중국은 두 가지 요인이 모두 작동하고 있는 듯하다. 취약한 중국의 민간소비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고 있다. 가전제품 구입 등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이구환신 정책이 시행되면서 전년 대비 5~6%대까지 증가했던 소매판매는 정책의 약발이 떨어진 7월에 다시 3%대로 내려앉았다.
과잉 공급은 더 뿌리가 깊다. 시진핑 집권 이후 강화되고 있는 국가자본주의가 낳은 자식이 과잉 공급이다. 후진타오 주석 시절 중국에서는 ‘국퇴민진(國退民進)’이 경제 운영의 주된 지향점이었다. 국유기업은 쇠하고, 민간기업은 약진한다는 의미인데, 이는 주로 지방정부가 가지고 있었던 기업에 대한 소유권을 민간으로 이양하는 민영화를 통해 현실화했다. 국유주 매각으로 불린 민영화 정책은 후진타오 집권기 내내 지속됐다. 중국은 정치적으로 공산당 1당 지배체제를 포기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지만, 그래도 덩샤오핑이 시작한 개혁·개방 이후 후진타오 시대까지는 시장을 이용해 경제의 효율성을 높이려고 하는 시도가 끊이지 않았다.
미·중 사이에서 한국은 ‘이중 부담’
2012년 시진핑 체제가 출범한 이후 흐름은 완전히 역전됐다. 중국이 필연적으로 시장경제를 향해 나아갈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던 이들은 거의 사라졌다. 그야말로 ‘국진민퇴(國進民退)’의 시대가 열렸다. 민간기업들에도 모두 공산당 당위원회가 조직돼 있다. 기업의 의사결정에 이사회의 권한이 큰지, 당위원회의 입김이 센지 명확하지 않다. 국유기업에는 이익보다 안정적인 공급과 고용이 더 우선적인 가치다. 시장의 힘에 의한 구조조정 압력이 현저히 약해지면서, 만성적 공급 과잉이 고착화됐다. 화웨이나 BYD, 샤오미 등 일부 기업들이 약진하고 있지만, 이는 압도적으로 큰 규모의 자원이 경제에 투입된 데 따른 수혜가 일부 기업들에 돌아간 결과로 해석하고 싶다.
제조업 각 분야를 포괄하고 있는 공급망에서 중국이 가진 경쟁력은 탁월하지만, 플레이어 각각이 지속 가능한 이익을 챙기면서 자리를 잡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이 밸류체인의 누군가는 이익을 고려하지 않고 싼 가격에 중간재를 공급하고 있고, 누군가는 이로부터 수혜를 입고 있다. 수혜를 보는 기업들은 사실상 보조금을 지급받고 있는 것과 같다. 국가경제 전체적으로 보면 경제적 자원의 투입과 산출의 효율이 높다고 보기는 어렵다.
시장은 쇠하고, 국가의 영향력은 커지고 있다. 혹자는 중국과 미국에서 동시에 국가자본주의가 흥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한국에는 이중의 부담이다. 기축통화국인 미국의 인플레이션은 글로벌 금융 환경을 긴축적으로 만든다. 미국의 금리가 높은 수준에서 유지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중국의 디플레이션은 세계 시장에서 한국과 경합하고 있는 중국 기업들의 가격 경쟁력을 높이는 요인이다. 중간재를 싸게 공급받는 중국 기업들이 사실상 보조금을 받는 것으로 의심할 수도 있지만, 미국 주도의 보호무역이 횡행하고 있는 요즘과 같은 상황에서는 어디 하소연을 하기도 힘든 노릇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