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 바둑을 잘 두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바둑을 만들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해졌어요.”
인공지능(AI) 알파고를 상대로 기지를 발휘해 역사적 1승을 거뒀던 프로 바둑기사 출신 이세돌 울산과학기술원(UNIST) 기계공학과·AI대학원 특임교수는 11일 울산 울주군 UNIST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AI 시대 창의성 중심의 인재 양성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알파고 대국 당시 인간의 바둑 기보를 학습한 AI가 어떻게 인간보다 더 창의적으로 바둑을 두는지 고민이 컸다”며 “제가 내린 해답은 저도 모르게 갇혀있던 인간의 고정관념 탓이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 교수는 “AI가 두는 수를 보고 나서야 ‘내가 왜 이렇게 쉬운 수를 못 뒀지’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며 “AI가 일자리를 위협하는 상황에서 인재 양성 역시 AI처럼 창의적 사고를 기르는 데 집중돼야 한다”고 했다. AI에 대한 종속 우려를 극복하려면 AI와 무작정 경쟁할 게 아니라 오히려 AI에게서 고정관념을 벗어난 창의적 사고를 배워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스스로의 경험에 비춰보면 알파고와 단순히 바둑 실력 대결을 펼치는 것은 ‘자동차와 경주하는 것’만큼 승산이 없으며 대신 게임의 규칙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는 창의력 대결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알파고와의 대국을 통해 이 같은 교훈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했다. 그는 “3국까지 내리 패배해보니 인간을 상대하듯 임하면 승산이 없겠다고 생각했다”며 “알파고는 사전 학습을 통해 극초반에 인간보다 유리하고 또 100수가 넘어가는 극후반에도 해당 게임의 데이터가 쌓여 승률이 높아지기 때문에 50~100수 사이 중반에 승부를 봐야했다”고 회상했다. 이어 “가만히 보니 알파고는 복잡한 수가 펼쳐져도 장고하지 않고 무조건 1분 정도의 일정한 시간을 할애해서 수를 뒀는데 이를 이용하면 버그(오류)를 유도해서 이길 수 있겠다고 판단했다”고 전했다. 기존 프로선수 간 대국에서 나올 수 없는 비정상적 ‘78수’로 알파고를 이겼던 그의 ‘영웅담’은 유명하다.
당시 깨달음에 지금 그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수단 역시 바둑을 포함한 보드게임이다. 그는 2019년 은퇴 후 보드게임을 제작한 경험을 토대로 지난달 UNIST 특임교수로 임용됐다. 이공계 학생들에게 창의성을 전수해주는 임무를 부여받았다. AI와 바둑 융합 연구와 함께 ‘이세돌 교수와 함께하는 과학자를 위한 보드게임 제작’ 강의를 열었다. 학생들은 1년 동안 이 교수의 멘토링을 직접 받아 결과물을 내게 된다.
이 교수는 “바둑은 인류가 만든 유일한 ‘추상 전략 게임’으로 창의력을 기르는 데는 이만한 게 없다고 생각한다”며 “나아가 이런 바둑을 변형하거나 완전히 새로운 보드게임 규칙을 직접 만들어보는 경험이야말로 교육에 필요해졌다”고 말했다. 그는 이날 실제 강의에서도 학생들에게 “미국 같은 선진국에서는 학생들이 아이디어를 내서 혁신적 제품이나 서비스를 개발하고 창업으로 발전시키는 사례가 많다”며 창의력 훈련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했다. 게임 제작과 플레이 과정에서의 팀워크 역시 창의력의 조건이다. 이 교수는 “인간의 창의적 사고는 데이터를 넘어 감정과 경험, 이는 다시 소통을 기반으로 한다”고 덧붙였다.
이 교수는 중장기적으로 AI 규범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하다고 봤다. 그는 “우리를 종속하려는 건 AI가 아니라 (AI를 이용하는) 우리 자신”이라며 “AI가 만든 음악·미술 등 창작물을 어디까지 인정할지, 또는 자율주행 기술이 보편화해서 인간이 아예 운전을 못하는 때가 오면 어떤 문제가 발생할지와 같이 신기술(수용)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부족하다”고 진단했다. 다만 내년 시행 예정인 AI기본법을 포함한 당장의 규제는 최소화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는 “미국·중국처럼 (AI 기술 수준이 높은) 나라에서는 규제 필요성이 나올 수 있는데 한국은 아직 그런 논의를 할 수준은 아니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