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비사
제8부. 전두환의 ‘노태우 대통령 만들기’
3회. 전두환의 ‘내각제’ 진심과 노태우의 ‘상왕’ 의심
‘솔직히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두려운 때가 많았다. (중략) 작은 일에서 국가 생존과 관계되는 큰일까지 너무 모든 것이 대통령 두 어깨에 짊어져 있다. 이런 대통령중심제는 정말 대통령이 되는 사람에게도 두려운 일이고 문제가 있다. (중략) 우리나라 대통령 권한은 거의 무제한이다. 그 권력의 막강함은 상상 이상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세상에 못할 일이 없는 것이 대한민국 대통령이다. 권한이 그토록 절대적이니 또 대권 싸움도 그토록 치열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는가. 하지만 유럽에 와 보니 어느 나라도 우리처럼 극한적으로 싸우지 않는다고 한다.’(전두환 회고록)
전두환, 영국 대처에게 내각제를 묻다
전두환 대통령이 1986년 4월 13일 저녁, 영국을 방문하고 스위스 로잔에 도착하자 참모들을 모아놓고 한 말이다. 전두환은 영국 대처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 내각제에 꽂혔다. 전두환은 ‘대통령중심제와 내각제, 직선제와 간선제에 대한 고견을 듣고 싶다’고 청했다. 대처는 ‘지역감정의 골이 깊은 영국이 의원내각제 대신 대통령중심제에 직선제를 선택했다면 국론 분열과 국력 낭비가 대단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전두환은 귀국하자마자 행동에 착수했다. 4월 30일 3당 대표들을 청와대로 불러 ‘여야가 합의해 개헌을 건의하면 재임 중에 개헌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개헌 논의의 물꼬를 튼 셈이다. 당시까지 전두환은 ‘기존의 5공 헌법에 따라 대통령을 뽑고, 88올림픽을 치른 다음 89년 이후 개헌을 논의하자’는 입장이었다.
따라서 전두환의 ‘임기 중 개헌 가능’ 발언은 야당의 개헌 요구에 대한 양보로 비춰졌다. 물론 전두환은 ‘대통령 직선제’가 아니라 ‘내각제’ 개헌을 생각하고 있었지만 정국이 일사천리로 풀려나갔다. 여야가 국회 내에 헌법개정특별위원회를 구성했다.
전두환 대통령은 유럽 순방 이전인 1986년 3월 11일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대통령중심제의 위험성에 대해 언급했다. ‘내가 버마(현 미얀마)에서 아웅산 테러 사건을 당하고 느꼈지만, 대통령 한 사람 해치워서 나라의 근본이 흔들린다면 아주 위험해요. (중략) 우리는 북한 때문에 대통령이 어디 나가기도 겁이 나. 내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를 위해서 겁이 나요.’
이런 생각이 있었기에 전두환은 내각제의 원조인 영국을 찾아 대처 총리에게 자문을 구했던 것이다. 그래서 전두환이 생각한 내각제는 영국식 순수내각제였다. 전두환은 또 독일 내각제를 보면서 내각의 안정성을 담보하기 위한 장치인 ‘건설적 불신임 제도’를 받아들이려고 했다. 임기 시작 후 최소 2년 정도는 총리가 불신임을 당하지 않도록 보장하는 제도다.
전두환에게 ‘내각제’는 묘수
전두환은 대통령중심제의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유럽 순방 이전까지 개헌 논의 자체에 반대했다. 자신의 경우 ‘평화적 정권교체’라는 과업을 완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해 왔다. 야당이 요구하는 ‘대통령 직선제 개헌’은 ‘정치적 혼란을 초래해 평화적 정권 교체와 88올림픽 성공을 위협한다’며 반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