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근까지 동거하던 남성에게 가정 내 협박에 시달리던 여성 A씨는 경찰의 임시숙소 입소 제안을 거부했다. A씨가 기르던 반려견을 도저히 집에 두고 떠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경찰 관계자는 “관내에 반려동물과 같이 들어갈 수 있는 숙소가 없을 때 이런 경우가 많다”며 “오밤중에 겨우 뛰쳐나와서도 입소를 망설이는 경우가 수두룩하다”고 설명했다. 가해자와 피해자 분리가 중요한 관계성 범죄 대응 과정에서 ‘반려동물 위탁’ 문제가 새로운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31일 서울시에 따르면 시는 범죄피해자의 반려동물을 맡아주는 ‘우리동네 펫위탁소 운영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그러나 10월 전후로 관련 예산은 전부 소진된다고 한다.

‘우리동네 펫위탁소’는 당초 취약 가구(기초생활수급자·차상위·한부모가족)의 반려동물 돌봄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위탁보호를 제공하고자 마련된 서비스다. 지난해 9월부터는 스토킹 등 범죄피해자도 지원 대상으로 확대했다. 스토킹 피해자가 반려동물과 같이 들어갈 수 있는 임시숙소가 많지 않은 데다 긴급 상황에 반려동물을 오랫동안 맡길 곳을 찾기엔 경제적 부담이 따르기 때문이다. 이에 서울시는 경찰 요청이 들어오면 야간에도 수용할 수 있도록 위탁소를 연결해주고, 범죄피해자의 반려동물에 한해선 최대 50일까지도 연장 위탁 보호가 가능하도록 운영하고 있다.
벌써 예산 부족…동물복지센터도 입소 불확실
다만 신생 제도라 예산이 넉넉지 않단 점이 걸림돌이다. 올해 ‘우리동네 펫위탁소’를 운영 중인 서울 내 17개 자치구 예산 총합은 약 1억원이다. 각 구별로 평균 500만~600만원의 금액을 지원한다. 광진구는 이달 예산 450만원을 전부 소진해 앞으로 네 달 동안은 펫위탁소 연계가 어렵다. 지난 22일 기준 중랑구와 송파구도 예산 600만원 중 400만원 이상을 썼다. 펫위탁소 지원 예산은 범죄피해자에게만 한정적으로 쓰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장기위탁자가 있으면 더욱 빠르게 소진된다. 특히 명절에 장기간 집을 비우면서 위탁소를 찾는 사람들도 많다.
서울시는 내년 모든 자치구로 펫위탁소 지원 사업을 확대할 계획이지만, 내년 전까지 개별 구의 예산 공백을 메우긴 어렵다는 입장이다. 서울시 동물복지지원센터를 연결해주는 방법도 있지만 마포·구로·동대문 세 곳에 불과한데다 유기동물과 함께 공간을 써 공간 확보 가능성이 불확실하다. 주간 입소만 가능해 늦은 밤 긴급 상황엔 대처하기 어렵다는 한계도 있다.

2차 피해 막으려면 반려동물 위탁·동반 필수
일각에선 피해자 동물 보호에까지 예산을 써야 하냐는 목소리도 나온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반려견을 협박의 수단으로 삼는 게 관계성 범죄의 전형적 특징이고, 강아지를 보호하려다 분리를 거부하면 2차 피해까지 번질 수 있다고 지적한다. 사회학자 클리프턴 플린은 저서 『동물학대의 사회학』에서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여성 보호소에 입소한 가정폭력 피해자 107명 중 약 20%가 반려동물의 안전을 우려해 가해자로부터의 분리를 주저했다고 소개했다. 실제 지난 5월 경기도 화성 동탄신도시에서 전 연인에게 납치돼 살해당한 30대 여성도 반려견 학대 협박에 시달렸다고 알려졌다.
허민숙 국회입법조사처 입법조사관은 “동물 학대는 피해자 통제 행위 중 하나”라며 “반려동물을 협박의 수단으로 삼아 ‘다음 차례는 너’라는 식으로 메시지를 남기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허 조사관은 “어쩔 수 없이 피해자가 집에 남는 선택을 하게 만드는 건 위험을 방치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라며 “반려동물 위탁 제도는 중앙정부에서 운영해야 할 정도로 중요성이 막강하다”고 강조했다. 권김현영 여성현실연구소장은 “반려동물을 키우는 1인 가구가 많아지는 가운데, 범죄 피해자의 반려동물 위탁 제도의 효과가 확실하다는 점에서 예산이 확충돼야 한다고 본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