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매일 악몽을 꾼다. 지도자의 폭력에 시달려야 했던 지옥같은 나날들, 이미 다 지난 일이라고 마음을 다잡지만 문득문득 떠오르는 그날의 아픔에 심장이 턱턱 막힌다. 운동을 그만두고 이제 새로운 삶을 시작했지만, 희망의 빛이 보이지 않는다. 이미 망가진 인생이다.
#. 경기 시작 휘슬만 울리면, 몸이 굳는다. 관중석의 환호성도, 팀 동료가 지르는 외침도 귓속에 들어오지 않는다. 심장은 터질 것 같고, 눈앞은 그저 뿌옇기만 하다.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해야할지 머릿속은 백지상태다. 이대로 운동을 포기해야 하는 걸까.
다른 사례지만, 공통점이 존재한다. 바로 스포츠 심리학적 개입을 통한 회복과 개선이 절실하다는 점이다. 엘리트, 아마추어, 생활 체육을 막론하고 운동을 하다보면, 누구나 한 번쯤 겪을 수 있는 일들이다. 심리적 불안에서 시작해 수행불안, 이를 넘어 트라우마로 남기도 한다. 과거에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이겨내야 한다’는 말로 덮었다. 하지만 세상이 달라졌다. 스포츠 심리의 중요성이 그만큼 커졌다. 스포츠 심리 분야 최전선에서 뛰고 있는 서주애 닥터서 스포츠심리연구소 대표 겸 유한대 건강웰니스학과 겸임 교수를 만났다. 그는 “운동은 기술과 체력, 심리까지 3요소가 모두 합쳐져야 최고의 퍼포먼스를 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상처를 들여다보는 일
서 교수를 찾는 선수들의 고민은 그들이 마주하는 인간 관계에서 시작되는 게 대부분이다. 스포츠계 최상위에 있는 성인 국가대표도 다르지 않다. 최고의 실력을 갖췄으나, 심리적인 이유로 ‘소진’ 상태에 놓여 있는 경우도 있다. 서 교수는 “내면을 들여다보면 심리적인 회복이 필요하다. 관계에서 오는 갈등, 특정 포인트에서 흔들리는 이유를 찾아야 한다”며 “다들 그 마음이 회복되면 ‘운동에 집중할 수 있고, 내가 잘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말했다.
아직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괴롭힘과 폭력은 일어나고 있다. 서 교수는 “직업 특성상 폭력에 노출된 선수들을 많이 만난다”며 “부모, 지도자, 동료와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는다면, 결국 모든 운동 훈련은 쳇바퀴를 돌리는 것과 같다. 심리적 회복이 중요한 이유”라고 설명했다.

얼굴도 모르는 그릇된 팬심에 눈물을 흘리기도 한다. 서 교수는 “악플로 고통받은 선수 중 일부는 세상 모든 사람이 악플 같은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손가락질이 현실에서도 계속된다는 생각에 한번 빠지게 되면 대인기피증이 생기고 관계를 쌓기 힘들어진다. 눈을 마주치기 어려워하기도 한다”며 “그 기분과 감정의 이유가 사실이 아니라는 것, 오류라는 것을 짚어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삐뚤어진 안경’을 조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삐뚤어진 안경이란 세상이 자신에게만 가혹하다고 인지하는 시선을 의미한다. 그는 “사람마다 민감성 정도가 다르다. 같은 피드백을 받더라도 누군가는 이 같은 생각을 할 수 있다”면서도 “그 정도가 심각하면 세상을 삐뚤어진 안경을 쓰고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한번 그렇게 인식하게 되면 자신이 피해자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이것부터 바로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폭력은 사회적으로도 민감한 이슈다. 사실관계를 정확하게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선수에게도, 지도자에게도, 사회에게도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
‘우리 엄마는 000이다’라는 문장에 빈칸을 채운다면 무엇이라 쓰겠는가. 정답은 없다. 자신이 느낀 그대로 쓰면 된다. 특정 내담자들은 빈칸에 채워진 답이 자신의 심리 상태를 판단하는 척도가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럴듯한 답변을 꾸며내 적는 이유다. 자신의 취약점을 드러내지 않겠다는 방어기제로, 상담사를 속일 수 있다고 믿는다.
금방 탄로 나고 만다. 서 교수는 “‘문장 완성 검사’는 약간의 키워드를 주고 50문항 정도의 빈칸을 채우게 하는 검사다. 이를 통해서 자신의 자아상, 부모 등 중요한 사람과의 관계성을 알 수 있다”며 “만약 ‘엄마는’이라는 문장 뒤에 ‘여자’라고 쓰면, 엄마와의 관계가 친밀하지 않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가깝지 않기 때문에 객관적 사실만 쓰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위장한 답을 쓸 때도 있다. 하지만 티가 난다. 감추고 싶은 부분은 튀기 마련이다. 맥락에서 어긋난 포인트가 보인다. 또 쓰는 장면에서 고민하는 문항, 미뤄둔 문항 등을 보면 고민이 무엇인지 알 수 있다”고 부연했다.
성격유형검사(MBTI)가 문화로 자리 잡은 것처럼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이유가 있다. 세상이 ‘올스탑’됐던 코로나19 팬데믹 시기가 변곡점이다. 정신 건강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달라졌다. 체육계도 마찬가지다. 심리적 장벽이 허물어지면서 멘털의 중요성을 깨닫는 계기가 됐다. 서 교수는 “코로나19로 스포츠도 홍역을 앓았다. 대회는 물론 훈련도 모두 멈췄다. 실제로 연구 결과에 따르면 이 기간 선수들의 우울도가 굉장히 높았다”며 “이때 심리 전공 파트, 스포츠과학센터에서 직접 차량으로 돌아다니며 선수들의 심리 컨설팅 지원 등을 진행했다. 이를 계기로 선수들이 심리 지원에 더 적극적인 태도를 갖게 됐다. 허들 자체가 낮아졌다는 느낌”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전까진 심리 치료 등은 아픈 사람, 힘든 사람에게만 필요한 영역이라는 인식이 팽배했다. 거부감을 느끼는 선수도 당연히 있었다”면서도 “이제는 힘들어서 지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인식이 대부분이다. 보통의 일상을 사는 누구나 진단을 받고 훈련, 상담을 받을 수 있다는 이해가 생긴 것이다. 또 이런 과정이 경기력에 도움된다는 필요성도 느끼고 있는 추세”라고 부연했다.
1000분의 1초도 다투는 치열한 경쟁의 세계에선 찰나에 최고의 퍼포먼스를 내야 한다. 기술, 체력, 심리라는 3요소가 모두 맞아떨어져야 가능하다. 서 교수는 “기술과 체력이 떨어진다면 멘털 훈련을 해도 100%의 퍼포먼스를 낼 수 없다. 하지만 기술, 체력이 100인데 심리가 조금 부족하다면 멘털 훈련을 통해 110의 퍼포먼스도 낼 수 있다. 결국 모두 같이 가야 하는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나를 들여다보는 일
서 교수는 긴장도가 높은 사람 중의 한 명이었다. 감정의 영문은 모르지만, 다른 사람들도 자신과 비슷하겠거니 생각만 하던 학창시절을 지나 대학생이 됐다. 대학에서 스포츠 심리라는 수업을 듣게 됐다. 그 자리에서 불안의 이유를 찾아냈고, 이 마음을 다스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웠다.
그는 “불안 챕터에서 상태 불안과 특성 불안에 대해 배웠다. 나의 특성 불안은 엄마 뱃속에서부터 타고난 불안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며 “나의 감정과 그 감정의 이유를 이해하게 됐고, 훈련을 통해 향상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회상했다.
그때부터 서 교수는 손이 부러지라고 필기를 했다. 자신을 돌아볼 수 있게 만든 이 학문이 너무나 새롭고 재밌었기 때문. 그렇게 쌓인 노트가 마침 빛을 발했다. “요점 정리 노트를 들고 박사학위 논문 심사받을 때 들고 갔다. 거기서 책을 보여 드리며 ‘20년 만에 이 공책의 꿈을 실현하는 날이 왔습니다’라고 말했다”는 서 교수는 “배고픈 학문인 걸 알았지만, 배우는 과정도 행복했기에 후회하지 않는다”며 웃었다.
꿈은 아직도 커다랗다. 단순히 내담자를 만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더 많은 멘털 코치를 육성하는 게 꿈이다. 서 교수는 “아카데미를 만들고 싶다. 나는 스포츠 심리, 일반 심리를 분리해서 배우다 보니 이곳저곳에서 공부를 오래 했다. 내가 한 공부들을 집대성해서 병행할 수 있는 루트를 만들고 싶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지금도 현장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다. 이 분야에 관심 있는 학생들이 정말 많다”면서도 “과거와 현재의 속도감은 다르다. 영상도 숏폼 콘텐츠가 대세지 않나. 나처럼 오래 공부를 해야 한다면 지칠 수 있다. 기본 과정, 실점 경험을 조금 더 효율적으로 빠르게 익힐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고 싶다”고 덧붙였다.
최서진 기자 westjin@sportsworld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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