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은뱅이책상 위에 놓인 자그마한 백등이 두툼한 메모지 위 정갈한 글씨를 비추고 있다.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전해진 고서(古書)의 이야기들이다. 조선 서지학의 최고 권위자, 후지모토 유키오(藤本幸夫) 도야마(富山)대 명예교수가 반백년을 쏟아부어 일궈낸 거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일본 전역에 산재한 고문헌 5만여권을 추적한 ‘일본 현존 조선본 연구’는 현재 진행형. 구도자의 길을 가듯 지금도 매일 이른 아침부터 밤까지 앉은뱅이책상 앞에 앉는 84세 백발의 학자를 지난달 만났다.

“재미있어요.” 55년째 한국 고서를 찾아다니는 일이 고되지 않냐고 묻자 능숙한 한국어가 튀어나온다. 1941년 교토에서 4남 1녀 중 막내로 태어난 그는 책 읽기를 좋아했다. 당시엔 한자로 된 책들이 많아 자연스레 한자를 익혔다. 대학이란 선택지가 찾아온 건 고등학교 1학년 12월의 일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부친이 사용하던 찻잔을 병원 세면장으로 가져가 씻기 시작했다. “대학에 가도 괜찮아.” 등 뒤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스무살 넘게 차이나 평소 어머니처럼 따르던 큰 형수였다. 대학 진학을 돕겠다는 형수의 말에, 그는 공부에 매달렸다.
그가 들어간 곳은 교토대 문학부. 그가 한국과 인연을 맺은 것은 대학 4학년, 오사카외국어대에서 조선어를 가르치던 김사엽 교수를 만나면서부터다. 초급 조선어부터 배웠는데 쉽지 않았다. 김 교수는 그를 위해 『동아새국어사전』을 구해줬는데, 설명이 조선어로만 되어 있어 설명문을 읽으려고 또 단어를 찾아야 하는 되돌이표의 연속이었다. 대학원에 진학한 그에게 김 교수는 한국 유학을 권했다.
유학이 이뤄진 건 몇 년 뒤 박사과정 때의 일이었다. 1967년 4월 8일 오사카에서 배를 탔다. 이틀 걸려 도착한 부산에서 다시 서울행 기차를 탔다. 그가 맨 처음 간 곳은 외솔 최현배 선생이 회장으로 있는 한글학회였다.“최 선생은 일제강점기 시절 조선어학회 활동을 하며 일본으로부터 탄압을 받지 않았나. 일본이 원수 같았을 텐데 일본인인 나를 초청했다. 김 교수 요청과 최 선생님의 관용에 유학이 실현된 것이었다.”

서울에서의 삶은 녹록지 않았다. 더듬더듬 한국어로 하숙방을 찾는 그에게 주인들은 “왜놈은 안 된다”고 막아섰다. 마음씨 좋은 한 복덕방 할아버지 덕에 어렵사리 집을 구했는데 ‘사례를 하고 싶다’고 하니 담배 한두 보루면 된다는 답이 돌아왔다. 찾아간 담배 가게. 그가 물었다. “담배 한 보루, 얼마에요?” 값을 치르고 복덕방에 돌아왔는데 경찰이 들이닥쳤다. “담뱃값도 모르는 간첩이 있다”는 신고 때문이었다.
한국 생활은 그에게 행복한 순간으로 남아있다. 하숙집 인근 돈암동 시장에 들러 달콤한 딸기를 사곤 했는데, 상인들은 “일본 유학생이니 조금 더 가져가라”며 덤을 얹어줬다. 한국 정부 국비 유학생 자격으로 서울대에서 공부하던 때엔 국어학의 거두로 불리는 이숭녕 박사에게 수업을 들었는데, 함께 청량리 자택에 발걸음을 할 정도로 사랑을 받았다.
조선 고문헌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유학 3년 차의 일이다. 한국엔 남아있는 옛 서적이 많지 않은데, 일본엔 한국에서 사라진 선본(善本·가장 좋은 판본) 희귀서가 많다는 거였다. ‘이것들을 전부 조사하면 조선어학에 공헌할 수 있지 않을까?’ 1970년 일본으로 돌아온 그는 조사에 들어갔다. 교토대 도서관,교토 인근 지역부터 훑기 시작했다. 그는 16세기 조선 통역관 최세진이 만든 한자 학습서인 훈몽자회(訓蒙字會)를 찾아냈다. 교토 근처 히에이잔(比叡山)에 목판 초판본이 남아있었다. 그는 “당시 서울대 이기문 선생께 말씀드렸는데 영인본(1971년)이 나왔다”고 했다.

이렇게 시작한 조선 고서 추적은 일생의 업이 됐다. 일본 궁내청은 물론이고 국회도서관, 지방 도서관과 개인 서고, 영국 대영도서관마저 너댓번을 찾아갔을 정도로 책이 있는 곳엔 어디든 달려갔다. 발품 들여 추적한 일본 전역에 있는 조선 고문헌은 약 5만권. 2006년 ‘일본 현존 조선본연구 집부(集部·개인문집)’를 냈는데 학계는 경악했다. 조선과 고려 문인들의 문집(약 1만권)이 일본 어느 곳에 있으며 활자와 종이질, 책의 상태는 물론 간행 연도와 판본 등을 낱낱이 기록했는데 한국엔 없는 귀한 문집의 세세한 정보까지 실려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집부 출간으로 이듬해 한국 정부에서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그의 연구와 조사는 계속됐다. 5만권의 조선 문헌을 집부 외에도 경부(經部·경전)와 사부(史部·역사),자부(子部·자전)로 분류했는데, 차례로 책으로 묶기로 한 것이다. 2018년엔 사부를 출간했다. 일본에 있는 역대 조선의 역사 문헌을 정리한 최초의 자료집이었다. 사부 출간으로 그는 2021년 일본 학자로선 최고 영예로 꼽히는 학사원상(学士院賞)과 나루히토(徳仁) 일왕(천황)으로부터 은사상(恩賜賞)을 받았다. 은사상은 일본 왕실의 하사금으로 만들어진 상으로 은제 꽃병이 수여되는데 학사원상과 은사상을 모두 받은 학자는 손에 꼽힌다. 그는 “이런 큰 상을 받게 된 건 운이 좋았던 덕이라고 생각한다”면서 “한국 관계 연구를 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라고 설명했다.

그가 “보여줄 것이 있다”며 자리를 일어섰다. 그가 사는 맨션(아파트)을 나서 한 층을 올라간 그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또 다른 집. 그의 또 다른 연구실이자 서고다. 부엌과 두 개의 방엔 그가 평생을 조사한 고문헌 자료 카드와 서적들이 발 디딜 틈 없이 가득하다. 우직하고 성실하게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연구에 몰두해 온 그만의 보물이다. 조사 자료를 보여주던 후지모토 교수는 “남은 자부와 경부, 도판(사진판)을 출간하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그의 말이다. “나 같은 작은 존재는 한·일 관계 같은 그런 큰 이야기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일본과 한국이 서로 사이좋게 지내기를 바란다. 내가 조선 서지학과 어학에 공헌할 수 있는 날은 얼마 남지 않았겠지만 조금이라도 양국의 관계에 도움이 된다면 좋겠다.”
내가 책을 연구하는 까닭
후지모토 유키오 도야마대 명예교수는 제자들 사이에서 ‘수행자’라고 불리기도 한다. 조선 서지학을 연구하는 그의 우직하고도 성실한 자세 때문이다. 그는 자신만의 조사법을 구축했는데, 지금도 한 달에 한 번 도서관이나 서고를 들러 조사를 한다. 어른 손바닥만한 크기의 두툼한 카드엔 그가 정한 28종의 고문헌 정보가 실린다. 조선본엔 간행자와 간행한 해, 간행지를 적은 간기가 없는 경우가 많아 그가 정리한 카드엔 책에 있는 문양이나 기호가 그려져있기도 하다. 책을 만들기 위해 판을 조각한 ‘각수’를 찾기위한 힌트들이다. 각수가 누구인지를 알면 간기가 없는 책도 언제 발간됐는지를 알 수 있어 그는 세세한 것들도 죄다 기록하고 있다.
책 이야기에 눈을 반짝일 정도로 그의 책 사랑은 남다르다. ‘제일 아끼는 책’을 묻자 현답이 돌아왔다. “많이 있지만 ‘논어’처럼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침이 담긴 책을 좋아한다. 책이 없다면 선인들의 지혜는 우리에게 전해지지 않았을 거다. 입으로 구전될 수도 있지만 선인들의 지식과 지혜를 담은 책은 그렇기에 가장 유의미한 존재다. 그래서 책 하나하나의 존재를 밝히고, 뜻을 밝히는 것이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