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록은 쉽습니다. 몇 줄로 요약한 평생도 그렇습니다. 기록된 평생은 몇 줄의 만남과 그보다 더 길게 남는 헤어짐입니다. 자식으로 만났다가 부모가 되어 헤어집니다. 앞서고 뒤따름에는 정해진 순서가 없습니다. 가을 다음은 겨울이고 그다음은 분명히 봄이라야 하지 않습니다. 부모보다 먼저, 사랑보다 앞서, 그리움보다 빨리, 떠나버리는 사람이 많습니다. 떠나는 버스를 붙잡을 수는 있어도, 약해지는 호흡과 잦아드는 맥박을 되살릴 수는 없습니다.
영원히 살 수 없습니다. 헤어짐은 필연입니다. 사랑으로도 묶어둘 수 없습니다. 날개 달린 것들은 날개에 힘이 생기면 둥지를 떠납니다. 발로 서는 것들은 발로 서는 순간 떠남을 예고합니다. 꼬리로 헤엄치는 것들은 알을 낳음으로 혈연을 끊습니다. 인연이 아름다운 것은, 헤어질 수밖에 없는 한정된 삶이 있어서입니다. 영원히 살 수 없어서, 마감할 수밖에 없는 관계는 더 오래 기억됩니다. 그것이 삶의 아이러니입니다. 산다는 것은 참 아이러니입니다.
헤어짐은 순간입니다. 순간일수록, 오래도록 마음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습니다. 이미 지나가 버린 이별의 순간인데도, 방금 지나친 일처럼 떠오릅니다. 함께 걸었던 골목의 촉감이 구두에 밟히고, 함께 먹었던 음식 냄새가 코끝을 스칩니다. 떠나고 보냈음에도, 그 사람은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습니다. 이런 게 이별의 흔적일까요. 그래서 지우면 지울수록 되려 또렷해지는 걸까요. 그런 걸 보면, 우리는 헤어짐 너머에서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익숙한 헤어짐은 없습니다. 나는 헤어짐 앞에서 무능합니다. 무장 해제된 포로처럼 쩔쩔맵니다. 죽음의 벽과 마주치면 한없이 쪼그라듭니다. 죽음이란 헤어짐은 특별해서, 죽음의 당사자에게 작별 인사를 할 수 없습니다. 작별 인사는 늘 남겨진 사람의 입과 손과 가슴을 통해 주고받습니다. 죽음의 영역 바깥에 남겨진 사람에게, 죽음의 영역 속으로 떠나버린 사람의 명복을 비는 것처럼 쓸쓸한 일도 없습니다. 힘내라는 말처럼 씁쓸한 것도 없습니다.
- 결국, 다 떠나더군요. 나라고 예외일 수 있겠어요.
말하지 못합니다. 호강에 겨운 소리 하는 것 같아서. 애써 도리질하다, 창문 너머로 슬쩍 한숨을 뱉습니다. 속이 없어서 그럴까요. 아니면 오월이 지나서 그럴까요. 빤하디 빤한 봄, 그 봄이 내려다보고 있어서 그럴까요. 하늘은 오늘도 오지게 파랗습니다. 파란 하늘에 대고 속으로 욕을 한 바가지 쏟아냅니다. 눈치도 없이 구름 한 점 없느냐고. 잡티 하나 없이 말끔하냐고. 그러면 또 스르륵, 명치끝 얼음이 녹아내립니다. 막힌 숨이 뚫립니다. 떠났든, 떠나보냈든, 헤어짐의 시간을 통과하는 이들의 막힌 숨이 스르륵 열리기를 소망합니다.
떠났다고 끝이 아닙니다. 떠난 자리를 추억이 지키고 섰습니다. 추억이라는 흔적은 그 무엇으로도 지울 수 없습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사라진 게 아닙니다. 보고 듣고 만질 수 없어도 엄연히 존재하는 게 있습니다. 그게 무언지는, 떠나보내고 나면 알게 됩니다. 끝난 것처럼 보여도, 끝나지 않은 것들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