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태령 대첩

2024-12-23

1894년 12월, 살을 에는 추위 속에 보국안민(輔國安民) 기치를 내건 동학농민군이 서울로 가는 길이 가로막혔다. 공주 우금치라는 고개였다. 농민군은 관군과 일본군 연합군의 화력에 맞서기에 중과부적이었다. 많은 농민들이 눈밭에 피를 흩뿌리며 쓰러졌다.

그로부터 꼭 130년이 흐른 지난 21일 밤, 전국농민회총연맹·전국여성농민회총연합이 조직한 전봉준투쟁단의 트랙터 30여대와 화물차 50여대가 경찰 차벽에 가로막힌 곳은 서울 남쪽의 남태령이라는 고개였다. 농민들은 양곡관리법이 이 정부하에서 두 번이나 거부된 농업 홀대에 항의하고 ‘내란 수괴 윤석열 체포’를 촉구했다. 경찰은 ‘서울 교통에 혼란을 줄 것으로 우려된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대통령의 거짓 출근차량에 협조하며 출근길 교통 체증을 유발한 공범인 경찰이 할 말은 아니었다. 경찰은 8년 전 박근혜 탄핵 때도 똑같이 행동했다. 농기계를 몰고 상경하려던 농민들은 그때도 서울 진입로에서 가로막혔고, 강경 진압을 당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을 통해 농민과 경찰의 대치 소식을 접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모여든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사람들이 늘어났고, 밤새 현장 생중계를 지켜보며 응원을 보낸 이도 많았다. 강추위 속 배달 오토바이가 커피·어묵·방한용품 등을 시위 현장에 실어날랐다. 우리는 지난 3일 밤 국회의 경험을 통해, 공권력은 누군가 지켜보고 있으면 마음대로 폭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걸 안다. 경찰은 32시간 뒤인 이튿날 오후 차벽을 열었다.

‘남태령 대첩’을 만든 것은 응원봉 들고 농민과 연대한 청년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같은 우리 사회의 소수자들이다. 우리의 밥과 채소, 고기를 만들지만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농민의 열악한 처지를 새삼 자신들과 연결짓는 사람이 많았다. 이들은 12·3 내란 사태 이후 광장에서 부쩍 주목받지만, 실은 언제나 스스로의 삶터에서 고투하고 있었다. ‘중장년 고학력 비장애 이성애자 남성’ 언론과 정치의 시선이 닿지 않았을 뿐이다. 남태령 대첩은 그 당사자들이 가만히 있지 않고 서로 연결되어 영향을 주고 이 공동체를 바꿔가겠다는 선언이다. 대통령 하나 바꾸자는 싸움이 아니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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