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 제조 라면, 다 똑같지 않아
고유번호 부여받아 개체성 획득
힘든 시절, 위로와 생존에 도움
촬영하면서 라면에 이름 붙이니
나에게 의미있는 특별한 존재 돼
라면만큼 독특한 위치를 가진 음식도 드물다. 세계 어디를 가도 쉽게 맛볼 수 있는 것이 라면이다. 부담 없는 가격으로 빠르고 쉽게 조리할 수 있는 편리성과 접근성은 라면의 대중성을 가속화 시켰다. 형태는 비슷하지만 지역의 문화와 재료에 맞게 변형되며 라면의 영토 확장은 계속해서 현재 진행 중이다.
황인모 작가가 가장 대중적인 음식이자 실용적인 음식의 대명사인 라면을 예술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신의 한 수처럼 보인다. 친근한 라면을 미학의 대상으로 풀어내며 대중과의 소통력을 높였다는 것은 그의 라면 작업이 갖는 독특성이다. 그는 국내의 다양한 라면의 사리들을 촬영하거나 라면 사리를 투명한 비닐봉지에 넣고 천장에서부터 연결한 설치 작품 등 50여점을 갤러리 팔조 개인전에 선보이고 있다.
라면은 가난한 시절의 따뜻한 한 끼 식사였다. 그래서인지 라면을 떠올리면 따뜻한 위로의 감성에 젖는다. 어려웠던 시절, 라면은 생존의 자양분이자 위로의 음식이었던 것이다. 단순한 식량 이상의 상징성이 라면에 부여돼 있다는 의미다.
그가 라면을 작업의 소재로 채택한 계기도 힘겨웠던 시절의 상처와 관련이 깊다. 사람들과의 관계로 인해 상처가 깊었고, 두문불출하던 시기에 불현듯 라면이 눈에 들어왔다. 집 밖으로의 외출은 라면을 구입하기 위한 것이 전부였던 시기에, 모서리가 부서진 라면의 사리에서 자신의 상처를 발견하고는 촬영을 하기 시작했다.
갤러리 팔조에 전시된 사진이나 설치 작품들은 모두 조리되기 전의 라면사리들이다. 공장에서 기계적인 라인에 따라 제조된 라면사리에서 무슨 개별성이 있을까 싶지만, 그는 “개별성은 분명 존재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의 이런 인식은 제조공장과 근로자명, 제조일과 고유번호를 조합한 작품명에서 분명해진다. 동일 업체, 동일 공장, 동일 근로자가 만든 라면이라도 고유번호가 달라 개체성을 획득하고 있다는 것이 근거였다.
“라면을 보고 있으면 예쁘다는 마음과 함께 신비스러운 마음도 생겼어요. 사진 촬영을 하며 라면에 이름을 붙이게 되니 특별한 존재로 다가왔죠. 우리가 주민등록증을 받고 사회의 한 명의 구성원으로서 자리 잡는 것처럼, 의미 없는 라면에 이름을 붙이고 나니 나와의 의미 있는 관계가 형성되는 특별한 존재로 자리를 잡았어요.”
전시작 중 라면 사리를 아크릴 액자에 넣고 좌대 위에 올려놓은 작품에선 라면을 향한 그의 속내가 드러난다. 바로 존중이다. 저렴함의 대명사인 라면을 고귀한 예술작품으로 격상해 놓은 것이다. 지금은 라면이 청춘들의 최애 음식으로 자리를 잡았지만, 어려웠던 시절의 라면은 애환의 음식이자 고독의 동반자였다.
그가 라면을 바라보는 정서도 이와 다르지 않다. 위로의 음식인 라면을 예술의 정점에 놓은 것이다. 그의 라면 예찬은 계속해서 확장되고 있다. 개인적 차원에서 사회적인 차원으로 라면의 정서를 확장한다. 인간관계에서 상처받고 아파할 시기에 자신의 생채기를 라면사리에서 발견했듯, 상처받고 방황하는 현대인의 초상을 라면 사진에 이입한다.
그가 “제조공장과 근로자명, 제조일과 고유번호를 조합한 작품명은 인간사회의 주민등록번호이며, 라면 작품은 증명사진”이라고 했다. 라면이 곧 현대인의 초상이라는 논리다. 이런 점에서 그의 라면 사진은 ‘다큐멘터리 사진’이다. “라면을 재료로 하는 작품에 고유번호를 부여했을 때 관리해야 하는 사람처럼 여겨졌어요. 떨어져 나간 사리들이 많은 라면일수록 더 연민이 갔어요. 제겐 라면은 상처받으며 살아가는 현대인의 초상과 다르지 않았어요.”
사실 그는 라면 작업 이전에 이미 사람들의 증명사진을 집중적으로 작업했던 경험의 소유자다. 위장이나 가식의 개입을 배제하기 위해 정면을 주시하는 사진만 고집했다. 카메라를 주시하는 무표정한 표정에서 피사체의 삶의 여정을 포착하기는 어렵다는 판단에 인물 주변에 그와 관련된 장치들을 놓았다.
이때 그는 피사체의 삶이나 내면 상태에 근접한 사진을 추구했고, 그 때문에 피사체와 수 개월간 소통하는 시간을 가졌다. 막상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순간에는 그가 소통하며 파악한 피사체의 주된 정서를 담아낸다. 이런 일련의 과정은 그의 인물 사진을 다큐멘터리로 규정하는 배경이며, 이번 전시작인 라면 작업 또한 피사체만 인간에서 라면으로 변화했을 뿐, 개념과 형식에서 동일하다.
“어떤 사람을 관찰 했을 때 그리움의 정서를 발견했을 때는 그리움의 정서를 담아내려 했습니다. 그것은 곧 저의 그리움이기도 했습니다. 제가 그리운 감정이 가득할 때, 피사체에서 그리움의 정서를 포착하는 것이죠.”
라면과 인물의 증명사진 사이의 차이는 감정의 배제다. 인물 사진에선 작정하고 감정을 개입시켰지만, 라면 작업에선 철저하게 특정 감정을 배제한다. 조명이나 촬영 기법 등을 활용해 그림자를 없애는 방식으로 객관화를 시도한다. 이는 그의 라면 작업을 다큐멘터리 사진으로 규정하는 배경이다. “라면의 그림자가 사람들의 감정을 유발하도록 하는 촉매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배제하려 했어요. 철저하게 객관화하려 한 것이죠.”
그의 작업은 논픽션에 집중된다. 작업 초기부터 디지털 카메라로 다큐멘터리 사진에 집중했다. 주로 현재의 도시 풍경이나 시골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했지만, 후대에 기록물로 남겨질 사진에 포커스를 맞췄다. 사진에 기록성이라는 목적성을 부여한 것. 과거 역사의 장소였지만 현재에는 인파로 가득한 도심의 번화가에서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4시간을 기다린 후 다시 셔터를 누르는 것이 작업이 핵심이었다. 4시간 사이의 사람들의 움직임은 식별이 어려운 선으로 남고, 주변 풍경은 또렷하게 사진에 남았다.
시골 어르신들을 촬영한 사진일 경우, 그들의 삶의 터전을 배경으로 했다. 과거와 현재의 삶이 연속된 현장으로 미래와의 연결 가능성을 모색한다. 이 작품들 역시 특정 시기의 초상이라는 점에서 증명사진이다. “저의 작업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시간의 연속성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그의 증명사진은 특정 장소에도 적용됐다. 자신의 개인전이 열리는 전시공간의 벽이나 바닥을 기록화 했다. 흰색 위주인 전시공간의 특성으로 그가 촬영한 사진은 회화처럼 인식됐다. 이 작업은 “예쁜 사진이란 무엇인가?”라는 의문으로부터 촉발했다. 흰색으로 깨끗하게 정돈된 공간에서 발견되는 먼지나 긁힌 자국, 갈라진 틈 등에 시선을 두었었다.
먼지나 긁힌 자국은 예쁜 사진의 범주에서 벗어난 것들이다, 하지만 그에게는 예쁜 사진의 요건을 완벽하게 충족한 대상이었다.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풍경이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예쁜 사진인데, 저는 그 기준을 깨고 싶었어요.” 논픽션으로 다양한 대상들의 증명사진을 촬영했지만, 전시 공간 사진은 그의 초상화였다. 사회에 돌렸던 시선을 돌려 자신에게로 향했다. 그의 작업이 지향했던 기록물적인 성격에서 탈피해 철저하게 자신의 내적 성찰에 초점을 맞춰 후 나온 사진이다.
전시 공간에 은유한 자화상이든, 라면이나 풍경에 이입한 현대인의 초상화이든, 그의 사진들은 큰 틀에서 인간과 인간 집단을 다룬다는 측면에서 인류학의 범주로 설정한다. 과거와 현재, 미래의 시간을 연결하며 총체적인 시각에서 인간을 다룬다는 점에서 나눈 분류다. 황인모의 ‘You, A Flower Too_Ramen Report (너도 꽃_라면레포트)’는 12일까지.
황인옥기자 hio@idaeg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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